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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 사회주의 이행 전략과 변혁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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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 사회주의 이행 전략과 변혁의 논리

10장. 이행 전략과 변혁의 논리

신당은 민주사회주의, 트로츠키주의, 사회민주주의, 생태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장기 전망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는 정당입니다. 관련 문서에서 비교했듯, 노동당의 강령은 자본-임노동관계의 폐지와 민주적 계획경제를 명시적 목표로 삼고, 정의당의 2023 사회비전은 혼합경제와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소유의 다원화와 세력균형의 이동을 추구하며, 녹색당은 생태적 한계와 탈성장, 지역 자치를 중심에 둡니다. 세 흐름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주의 운동이 100년 넘게 벌여 온 전략 논쟁 안에 있습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국가를 장악할 것인가 우회할 것인가, 체제 안의 요구를 어떻게 체제를 넘어서는 요구와 연결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하나의 정답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서로 다른 입장들이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통찰들을 남겼습니다.

이 장은 그 논쟁을 여러 갈래로 정리합니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 안의 고전 논쟁(10.1), 트로츠키의 이행강령(10.2), 고르의 비개혁적 개혁(10.3), 국가를 둘러싼 풀란차스와 밀리밴드의 논쟁(10.4), 그람시의 진지전(10.5), 라이트의 변혁 논리(10.6), 정책 피드백과 탈상품화의 이론(10.7), 최근의 계급투쟁형 사회민주주의 논의(10.8)를 차례로 다룹니다. 그리고 이 논쟁들에서 신당의 '공통 이행강령'에 들어갈 요구를 고르는 기준을 도출하고(10.9), 논쟁이 신당에 남기는 과제를 정리합니다(10.10).

이 장의 결론을 미리 말하면, 신당의 세 흐름은 장기 전망에서는 다르지만 지금 무엇을 어떻게 요구해야 하는가에서는 상당한 공통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당사자가 조직해서 쟁취하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의 힘이 커지며, 자본의 일방적 권한을 제약하는 요구'라는 기준으로 요약됩니다.

10.1 개혁이냐 혁명이냐: 고전 논쟁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사회주의 정당이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당원, 수많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신문과 교육 기관을 거느렸고, 선거 때마다 득표가 늘었습니다. 바로 그 성공 속에서 '이 정당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논쟁은 이후 100년 동안 좌파 정치의 기본 구도가 됐습니다.

10.1.1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핵심 주장.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 1899)은 마르크스의 예측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거듭하다 붕괴하고, 중간계급이 몰락해 사회가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노동자로 양극화되며, 노동자의 생활 조건이 악화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19세기 말의 현실이 달랐다고 지적했습니다.

  •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고, 신용 제도와 기업 연합(카르텔)을 통해 위기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 중간계급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사무직과 전문직이 늘고 있었습니다.
  • 노동자의 생활 조건은 노동조합 투쟁과 사회 입법을 통해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이 관찰에서 베른슈타인은 전략적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붕괴와 혁명적 단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확대, 노동조합의 성장, 협동조합의 확산, 의회를 통한 사회 개혁이 쌓여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당이 혁명적 언어를 버리고, 실제로 하고 있는 일, 즉 개혁 정당으로서의 활동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라는 그의 말은 이 입장을 압축합니다.

메커니즘: 개혁의 누적. 베른슈타인의 전략에서 사회주의는 먼 미래의 도착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노동시간이 한 시간 줄고, 사회보험이 하나 생기고, 협동조합이 하나 늘 때마다 사회는 조금씩 사회주의에 가까워집니다. 이 관점에서 개혁은 혁명을 준비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주의의 실현입니다.

배경: 에르푸르트 강령의 이중 구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논쟁을 일으킨 배경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 구조가 있었습니다. 1891년 채택된 에르푸르트 강령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앞부분은 카우츠키가 주로 쓴 이론 부분으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선언했습니다. 뒷부분은 일반적인 정당 공약처럼 보이는 실천 요구 부분으로, 선거권 확대,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 보호 입법 같은 당면 요구를 담았습니다. 당은 이론 부분에서는 혁명을 말했지만, 실제 활동은 뒷부분의 개혁 요구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이 모순을 지적하며, 당이 실제로 하는 일에 맞게 이론을 고치자고 한 것입니다.

근거와 비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당의 공식 입장으로는 거부됐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20세기 서유럽 사회민주주의가 베른슈타인이 제시한 길을 걸었습니다. 스웨덴, 독일, 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의회를 통해 복지국가를 건설했고,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대신 규제하고 보완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비판자들은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해 왔습니다. 첫째, 개혁이 누적되면 사회주의가 된다는 가정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복지국가는 노동자의 삶을 크게 개선했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서지는 않았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복지국가의 성과 일부가 되돌려지기도 했습니다. 개혁은 누적될 뿐 아니라 후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둘째, 목표를 버린 운동은 방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1990년대 이후 시장 친화적 노선을 택하면서 노동자의 지지를 잃은 것(9장의 브라만 좌파)은, 목표 없는 운동이 결국 기성 체제에 흡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국 적용. 관련 문서에서 정리했듯, 정의당의 2023 사회비전은 베른슈타인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계보에 있습니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인용하며 복지국가의 발전적 계승을 표방하고, 국가 권력의 일거 장악이 아니라 세력균형의 제도적 변화를 추구합니다. 다만 사회비전은 20세기 복지국가가 '경쟁하고 자립하는 개인'이라는 자본주의적 인간관을 공유했다는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며, 이를 생태와 돌봄의 관점에서 급진화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베른슈타인의 후예이면서, 베른슈타인의 한계를 의식하는 입장입니다.

개혁의 가역성: 한국의 예.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 즉 개혁은 누적될 뿐 아니라 후퇴할 수도 있다는 점은 한국에서도 확인됩니다. 종합부동산세는 주택 가격 급등기에 강화돼 2022년 6.8조 원이 걷혔지만, 2023년 세율과 과세 기준이 완화된 뒤 2024년에는 4.2조 원으로 줄었습니다(4장). 한 정부에서 이뤄진 개혁이 다음 정부에서 되돌려진 것입니다. 이 경험은 개혁을 법과 제도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개혁을 지키는 사회적 세력, 즉 그 개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조직돼 있지 않으면, 정권이 바뀔 때 개혁은 쉽게 되돌려집니다. 반대로 보편적 제도와 조직된 수혜자를 가진 개혁은 쉽게 후퇴하지 않습니다(10.7).

신당에 대한 함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신당에 두 가지를 알려 줍니다. 첫째, 의회와 제도를 통한 개혁은 실제로 노동자와 시민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신당의 입법 활동(17장)과 지방의회 활동은 이 계보의 실천입니다. 둘째, 그러나 개혁은 후퇴할 수 있고, 목표 없는 개혁은 흡수될 수 있습니다. 신당이 개혁 입법에 힘쓰면서도, 그 개혁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설명하는 장기 전망(15장)을 함께 제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개혁의 성과를 지키는 힘은 입법 그 자체보다, 그 개혁을 원하고 지키는 조직된 당사자에게서 나옵니다(10.7의 정책 피드백).

10.1.2 룩셈부르크의 비판: 개혁은 목적과 연결될 때 의미가 있다

핵심 주장.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900)에서 베른슈타인을 비판했습니다. 이 비판은 흔히 '혁명파의 개혁 반대'로 오해되지만, 실제 내용은 다릅니다. 룩셈부르크는 개혁 투쟁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노동조합 투쟁과 의회 투쟁,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이 사회민주주의의 필수적인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녀가 비판한 것은 개혁을 목적 그 자체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메커니즘: 투쟁의 학교. 룩셈부르크에게 개혁 투쟁은 노동계급이 조직과 의식을 키우는 학교였습니다.

  •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서로 연대하는 법을 배웁니다.
  • 투쟁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호황기에 얻은 임금 인상이 불황기에 다시 깎이고, 법으로 얻은 권리가 사용자의 저항과 우회로 무력화되는 경험입니다.
  • 이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더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를 스스로 깨닫습니다.

이 관점에서 개혁 투쟁의 가치는 개혁이 얼마나 얻어지느냐만이 아니라, 그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조직과 의식이 얼마나 성장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을 목적 자체로 삼으면, 노동계급 정당은 체제 안의 이익집단으로 변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망을 잃습니다. 개혁을 얻어 내기 위해 체제와 타협하는 것이 정당의 일이 되고, 노동자의 자율적 행동은 그 타협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대중파업과 자발성. 룩셈부르크는 이후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1906)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분석하며, 대중의 자발적 행동이 정당과 노조의 계획을 넘어서는 창조적 힘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정당의 역할은 대중의 행동을 위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행동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경험을 정치적 의식으로 연결하는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관점은 정당의 관료화에 대한 경계로 이어집니다.

근거와 비판.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개혁과 혁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후 좌파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판자들은 룩셈부르크가 대중의 자발성을 지나치게 믿었고, 조직과 제도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합니다. 또 개혁 투쟁이 노동자의 의식을 저절로 급진화한다는 가정도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개혁 투쟁의 경험은 노동자를 급진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체제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국 적용. 관련 문서에서 정리했듯, 노동당의 강령은 자본-임노동관계의 폐지와 노동자·민중권력의 수립을 궁극 목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당면한 노동권과 생존권 투쟁을 중시합니다. 룩셈부르크의 계보에 가까운 입장입니다. 한국의 노동운동 경험도 룩셈부르크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원청교섭을 요구하는 하청 노동자의 투쟁은 임금과 안전이라는 당면 요구에서 출발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청이 실질적 사용자라는 인식, 하청 구조 자체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형성됩니다. 노란봉투법이 통과된 뒤에도 원청 431곳 가운데 8곳만 교섭에 나선 현실(4장)은, 법으로 얻은 권리가 사용자의 저항 앞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룩셈부르크적 경험의 예입니다.

룩셈부르크와 민주주의. 룩셈부르크의 사상에서 신당이 특히 주목할 부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녀는 1918년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혁명 정부가 언론과 집회의 자유, 선거를 억압하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자유는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의 것이 되면 자유가 아니며,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여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룩셈부르크에게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확대여야 했고, 소수 지도부가 대중을 대신해 결정하는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이 입장은 신당의 조직 원칙과 직접 연결됩니다. 정파의 공존, 소수 의견의 공식 기록, 당원 총투표는 룩셈부르크가 말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를 정당 안에서 보장하는 장치입니다(12장, 18장).

신당에 대한 함의. 룩셈부르크의 기준은 신당의 세 흐름이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을 줍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와 관계없이, 모든 개혁 투쟁이 당사자의 조직과 역량을 키우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정의당 계열이 입법을 통한 개혁을 중시하더라도, 그 입법이 당사자의 조직된 요구 속에서 추진되고 당사자의 힘을 키우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노동당 계열이 체제 전환을 목표로 삼더라도, 당면 개혁 투쟁을 통해 당사자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그 목표에 가는 길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은 10.9의 첫 번째 기준, 즉 '자율적 역량의 강화'로 이어집니다.

10.1.3 카우츠키의 소모전 전략

핵심 주장. 카를 카우츠키는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의 대표적 이론가였습니다. 그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을 지키는 쪽에 섰지만, 실천적 전략에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권력으로 가는 길』(1909) 등에서 카우츠키는 노동계급 정당이 선거와 의회, 노조를 통해 힘을 꾸준히 축적하다가, 자본주의의 위기가 무르익는 결정적 시기에 권력을 장악한다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메커니즘: 소모전과 타도전. 1910년 대중파업을 둘러싼 룩셈부르크와의 논쟁에서, 카우츠키는 군사사가 한스 델브뤼크의 용어를 빌려 두 가지 전략을 구분했습니다.

  • 타도 전략: 적을 정면으로 공격해 한 번의 결정적 전투로 쓰러뜨리는 전략입니다. 대중파업으로 국가 권력에 직접 도전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소모 전략: 결정적 전투를 피하면서 자신의 힘을 보존하고 늘리며,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선거에서 득표를 늘리고, 노조와 당 조직을 키우고, 의회에서 입지를 넓히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카우츠키는 당시 독일의 조건, 즉 강력한 국가와 군대, 아직 과반에 이르지 못한 사회민주당의 세력에서는 소모 전략이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섣부른 대중파업은 국가의 탄압을 불러 수십 년간 쌓아 온 조직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을 통한 적극적 공세가 대중의 의식과 조직을 키운다고 보았습니다.

비판: 조직 보존의 역설. 카우츠키의 소모전 전략은 대중정당의 조직적 축적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조직 없이는 어떤 전략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전략에는 역설이 있었습니다. 조직을 보존하는 것이 전략의 중심이 되면, 조직 보존 자체가 목적이 되어 위험한 투쟁을 피하게 됩니다. '결정적 시기'는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미뤄집니다. 로베르트 미헬스의 과두제 연구(12장)는 바로 이 시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당의 지도부와 관료는 조직을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급진적 행동을 억제하게 된다는 것이 미헬스의 관찰이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독일 사회민주당 원내단이 전쟁 공채에 찬성한 것은, 조직 보존의 논리가 원칙을 앞선 사례로 자주 거론됩니다.

한국 적용. 카우츠키의 딜레마는 한국 진보정당에도 익숙한 문제입니다. 정당이 의석과 보조금, 조직을 지키는 데 집중하면, 조직을 위험하게 만드는 선택, 즉 거대 정당과의 관계를 끊는 선택이나 인기 없는 원칙을 지키는 선택을 피하게 됩니다. 반대로 조직을 무시한 급진적 행동은 조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원자료는 한국 진보정당이 조직 보존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당의 당비 납부자는 2020년 47,589명에서 2024년 22,356명으로 줄었습니다(5장). 신당은 카우츠키의 딜레마의 두 방향 모두에서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조직이 약해서 소모전을 치를 힘도 부족하고, 조직이 약해서 공세를 감당할 힘도 부족합니다.

원내 진입 이후의 소모전. 카우츠키의 딜레마는 원내에 진입한 진보정당이 흔히 겪는 문제로 다시 나타납니다. 의석을 얻으면 정당의 자원과 관심은 의정 활동, 언론 대응, 다음 선거 준비로 집중됩니다. 보좌 인력과 정책 역량이 원내에 모이고, 지역 현장과 노동 현장의 조직 활동은 상대적으로 약해집니다. 여러 나라의 진보정당이 원내 진입 이후 현장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원내 활동은 조직의 축적이지만, 그것이 현장 조직을 대신하면 카우츠키가 말한 조직 보존의 역설이 생깁니다. 신당은 의석을 얻었을 때 원내 자원의 일정 비율을 현장 조직 지원에 배정하는 원칙을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

신당에 대한 함의. 카우츠키의 교훈은 조직의 축적은 필요하지만, 조직 보존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당은 당원과 재정, 거점을 꾸준히 늘리는 소모전의 과제(20장의 조직 KPI)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 조직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상근자와 선출직의 순환 규칙입니다. 같은 사람이 오래 당직과 공직을 맡으면 조직 보존의 이해가 굳어집니다(12장). 둘째, 원칙이 걸린 결정을 당원 총투표에 부치는 규칙입니다. 지도부가 조직 보존을 이유로 원칙을 양보하려 할 때, 당원이 그 결정을 직접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1.4 신당에 대한 함의

신당 안에는 베른슈타인, 룩셈부르크, 카우츠키의 후예들이 함께 있습니다. 정의당의 사회비전은 점진적 구조 개혁의 계보(베른슈타인과, 조직 축적을 중시한 카우츠키의 일부)에, 노동당의 강령은 체제 전환과 대중의 자기 조직을 강조하는 계보(룩셈부르크)에 가깝습니다(관련 문서). 녹색당은 이 논쟁의 바깥에서 출발했지만, 지역 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룩셈부르크의 자발성 강조와 닮은 면이 있습니다.

이 논쟁은 10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고, 신당이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당이 해야 할 일은 네 가지입니다.

  1. 논쟁을 공개적 토론의 대상으로 제도화합니다. 논쟁을 억누르면 음성적 정파 갈등이 되고, 결국 분당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12장의 정영태). 15장의 장기 전망 병기 조항과 18장의 정파 등록 제도는 논쟁을 공개적이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한 장치입니다. 강령에 서로 다른 장기 전망을 병기하고, 정기적인 강령 토론에서 그 전망들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2. 룩셈부르크의 기준을 공통 원칙으로 삼습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와 관계없이, 모든 개혁 투쟁이 당사자의 조직과 역량을 키우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에는 세 흐름 모두가 동의할 수 있습니다(10.1.2).
  3. 베른슈타인의 교훈을 기억합니다. 개혁은 실제로 삶을 바꿀 수 있지만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개혁의 성과를 지키는 것은 조직된 당사자의 힘입니다.
  4. 카우츠키의 딜레마를 제도로 관리합니다. 조직의 축적과 원칙의 유지를 함께 지키기 위해 순환 규칙과 당원 총투표를 둡니다.

이 네 가지는 신당이 '장기 전망은 달라도 지금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정하는 출발점입니다. 이어지는 절들은 그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는 기준을 더 구체화합니다.

10.2 트로츠키의 이행강령

핵심 주장. 레온 트로츠키가 제4인터내셔널 창립 문서로 쓴 「자본주의의 죽음의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1938, 이른바 '이행강령')는 사회민주주의의 강령 구조를 비판했습니다. 당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강령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추구하는 개량을 담은 최소강령과, 사회주의라는 먼 목표를 담은 최대강령입니다. 트로츠키는 이 분리가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최소강령만 실천하면 정당은 개량주의로 흐르고, 최대강령은 기념일 연설에서만 언급되는 장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강령 사이에 다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메커니즘: 이행적 요구. 트로츠키는 두 강령 사이를 잇는 이행적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이행적 요구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 현재에서 출발합니다. 이행적 요구는 대중의 현재 의식과 필요에서 출발합니다. 물가 상승에 시달리는 노동자에게는 임금 문제에서, 실업에 시달리는 노동자에게는 일자리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대중이 이미 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요구입니다.
  • 체제와 충돌합니다. 그러나 그 요구의 실현은 자본의 권력과 충돌하게 만듭니다. 요구가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쉽게 수용될 수 없는 형태를 가집니다. 대중은 요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막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 자기 조직을 요구합니다. 투쟁 과정에서 대중이 스스로 조직하게 만듭니다. 요구의 실현을 감시하고 강제할 노동자 조직, 예를 들어 공장위원회가 필요해집니다.

구체적 요구의 예. 이행강령에 제시된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 물가연동 임금: 물가가 오르면 임금이 자동으로 따라 오르게 하는 요구입니다. 노동자의 실질 소득을 지키는 요구이지만, 자본의 이윤을 직접 압박합니다.
  • 노동시간 연동: 실업이 생기면 노동시간을 줄여 모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나누되 임금은 유지하는 요구입니다. 실업을 해결하는 요구이지만, 고용과 노동시간에 대한 자본의 결정권에 도전합니다.
  • 영업 비밀의 폐지: 기업의 회계 장부를 노동자에게 공개하게 하는 요구입니다. 사용자가 '회사가 어렵다'며 임금 인상을 거부할 때, 실제 장부를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 노동자 통제와 공장위원회: 노동자가 생산과 경영을 감시하는 조직을 만드는 요구입니다.

배경: 대공황과 파시즘의 시대. 이행강령이 쓰인 1938년은 대공황의 여파와 파시즘의 확산, 전쟁의 임박이 겹친 시기였습니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가 더는 노동자에게 의미 있는 개혁을 줄 수 없는 '죽음의 고통' 단계에 들어섰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즉 일자리와 생활 가능한 임금조차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는 실현되기 어렵고, 그 요구를 끝까지 추구하면 체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대 인식은 이행강령의 강점이자 한계입니다. 전후 서유럽처럼 자본주의가 성장하며 개혁을 수용한 시기에는, 이행적 요구가 체제에 흡수되는 일이 더 쉽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근거와 비판. 이행강령에 대해서는 두 방향의 비판이 있습니다.

  • 조작의 위험: 이행적 요구가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기 위한 전술적 도구로만 쓰이면, 대중이 그 요구 자체를 진지하게 추구한다는 점을 무시하는 조작이 될 수 있다는 비판입니다. 대중은 요구가 실현되기를 원하는데, 정당은 요구가 실현되지 않는 과정에서 대중이 급진화하기를 원한다면 둘 사이에 불신이 생깁니다.
  • 흡수의 위험: 이행적 요구가 실제로 실현되면, 체제가 그것을 흡수해 개량으로 바꿔 버릴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물가연동 임금은 여러 나라에서 실제로 제도화됐지만 자본주의를 흔들지 않았습니다. 체제는 생각보다 유연하게 요구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비판은 이행적 요구가 고정된 목록이 아니라, 시대와 조건에 따라 새로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한 시대의 이행적 요구가 다음 시대에는 체제에 흡수된 개량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적용. 이행강령의 논리는 오늘 한국의 요구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원청교섭 이행강제금(17장): 하청 노동자의 현재 요구(임금·안전)에서 출발하지만, 그 실현은 원청 자본의 교섭 거부 권한과 충돌하고, 노동자의 조직을 필요로 합니다. 이행적 요구의 현대적 예입니다.
  • 조세지출 귀착 정보의 공개(17장): 기업의 장부를 공개하라는 트로츠키의 요구와 닮은 요구입니다. 대기업집단에 대한 감면이 2025년 4.3조 원에서 2027년 24.6조 원(전망)으로 늘어나는 상황(16장)에서, 감면의 귀착을 기업집단별로 공개하라는 요구는 자본이 국가로부터 받는 혜택을 드러냅니다.
  • 흡수의 사례: 대중교통 요금 지원은 흡수의 예를 보여줍니다. 정부가 모두의 카드 예산을 2026년 5,274억 원에서 2027년안 8,652억 원으로 늘리면서(16장), 교통비 부담 완화라는 요구는 체제 안의 정책으로 흡수됐습니다. 이행적 성격을 되살리려면 요구를 '무상교통과 준공영제의 공영제 전환'으로 재정의해, 버스회사의 과다 이윤이라는 자본의 이해와 충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 노동운동의 이행적 요구. 이행적 요구의 논리는 한국 노동운동의 요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차별 철폐 요구는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같은 대우를 하라는 현재의 요구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요구를 끝까지 추구하면, 기업이 비정규직을 쓰는 이유, 즉 고용 조정과 비용 절감에 대한 자본의 권한과 충돌하게 됩니다. 원청교섭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청 노동자의 임금과 안전이라는 현재의 요구에서 출발하지만, 원청이 하청 구조를 통해 책임을 피해 온 방식 전체를 문제 삼게 됩니다. 이 요구들은 트로츠키가 말한 이행적 요구의 구조, 즉 현재에서 출발해 체제의 한계와 부딪치고 당사자의 조직을 필요로 하는 구조를 가집니다.

신당에 대한 함의. 이행강령의 핵심 통찰은 요구의 형태가 운동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체제가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요구만 내세우면 운동은 체제 안으로 흡수되고(8장의 메귀드 수용 전략), 대중의 현재 의식과 동떨어진 요구만 내세우면 운동은 고립됩니다. 신당의 요구 목록은 이 두 위험 사이에서 설계돼야 합니다. 동시에 조작의 비판을 피하려면, 신당은 요구의 실현을 진심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요구가 실현되면 그것을 성과로 인정하고, 다음 단계의 요구로 나아가는 것이 트로츠키의 논리를 민주적 정당에 맞게 번역하는 방식입니다. 10.9의 세 번째 기준, 즉 '다음 개혁의 조건 형성'은 이 통찰에서 나옵니다.

10.3 고르의 비개혁적 개혁

핵심 주장. 앙드레 고르(『Stratégie ouvrière et néocapitalisme』, 1964; 영역본 『Strategy for Labor』, 1967)는 1960년대 서유럽의 고도성장기에 이 책을 썼습니다. 당시 서유럽의 노동자들은 임금 상승과 복지 확대로 생활이 크게 나아지고 있었고, 자본주의의 붕괴나 혁명의 전망은 멀어 보였습니다. 고르는 이 조건에서 두 가지 기존 전략이 모두 막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혁명을 기다리는 전략은 현실의 노동자와 동떨어졌고, 체제 안의 개량에 만족하는 전략은 자본주의를 강화할 뿐이었습니다. 고르는 그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고, 그 핵심이 개혁주의적 개혁과 비개혁적 개혁의 구분이었습니다.

메커니즘: 두 개혁의 차이.

  • 개혁주의적 개혁은 체제의 합리성과 수용 가능성을 기준으로 요구를 제한합니다. 요구를 내놓기 전에 '자본주의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가',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지 않는가', '재정이 허락하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그 결과 요구는 체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뭅니다.
  • 비개혁적 개혁은 체제가 감당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기준으로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실현이 노동자와 시민의 자율적 권력을 확대하고, 자본주의의 논리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는 개혁입니다. 고르는 이를 '구조 개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기준. 고르는 개혁이 비개혁적인지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으로 누가 결정하는가를 강조했습니다. 같은 내용의 개혁이라도 결정 방식에 따라 성격이 달라집니다.

  • 같은 임금 인상이라도 국가가 위에서 결정해 주는 것과 노동자가 교섭으로 쟁취하는 것은 다릅니다. 앞의 경우 노동자는 수혜자로 남고, 뒤의 경우 노동자의 조직과 교섭력이 커집니다.
  • 같은 주거 정책이라도 정부가 임대료를 규제하는 것과 세입자 조직이 임대인과 교섭해 임대료를 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앞의 경우 정책이 바뀌면 보호도 사라지지만, 뒤의 경우 세입자의 조직된 힘이 남습니다.

고르는 뒤의 경우를 대항 권력의 형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비개혁적 개혁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와 다른 원리, 즉 이윤이 아니라 필요, 경쟁이 아니라 연대, 위계가 아니라 민주적 결정이 작동하는 영역을 넓혀 가는 개혁입니다. 이런 영역이 넓어질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고르의 후기 사상. 고르는 이후 『노동계급이여 안녕』(1980), 『경제적 이성 비판』(1988) 등에서 생태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끝없는 경제 성장과 소비 확대가 인간의 자유를 넓히지 않는다고 보고, 노동시간 단축과 '필요에 따른 생산', 자율적 활동의 확대를 강조했습니다. 고르의 사상은 사회주의와 생태주의를 잇는 다리가 됐습니다.

배경: 1960-1970년대 유럽 노동운동. 고르의 문제의식은 당시 서유럽 노동운동의 변화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노동운동에서는 임금 인상만이 아니라 작업 조직, 노동 속도, 작업장의 위계 자체를 문제 삼는 요구가 제기됐습니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얼마나 빨리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 발언권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요구는 임금 인상처럼 돈으로 해결되지 않고, 작업장에서의 권력 관계를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고르가 말한 비개혁적 개혁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고르의 이론은 이런 현장의 요구를 전략의 언어로 정리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근거와 비판. 고르의 개념은 1960-1970년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노동운동, 그리고 이후 녹색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판자들은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합니다. 첫째, 무엇이 비개혁적 개혁인지를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같은 개혁이 맥락에 따라 체제를 흔들 수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비개혁적 개혁이 자본의 저항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본이 투자를 줄이거나 해외로 떠나는 방식으로 저항하면, 개혁은 좌절될 수 있습니다(10.6의 라이트도 이 문제를 다룹니다).

한국 적용. 관련 문서에서 정리했듯, 정의당 2023 사회비전의 전략론은 고르의 개념과 유사한 구조를 가집니다. 노동자의 기업 소유를 제도적으로 누적 확대하는 스웨덴식 임노동자기금 구상은 비개혁적 개혁의 대표적 예입니다. 노동자가 기업의 지분을 점차 소유하게 되면, 투자와 경영에 대한 자본의 일방적 결정권이 점차 제약됩니다. 녹색당의 에너지 협동조합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고르의 후기 생태주의와 연결됩니다. 주민이 에너지를 직접 생산하고 소유하는 것은 에너지에 대한 '누가 결정하는가'를 바꾸는 개혁입니다.

노동시간 단축과 '누가 결정하는가'. 고르가 후기에 특히 강조한 노동시간 단축은 '누가 결정하는가' 기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노동시간 단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업이 경영 사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근무 시간을 줄이고 임금도 함께 깎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노동자의 소득을 줄이고 결정권을 기업에 남깁니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가 교섭과 입법으로 임금 삭감 없이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생산성 향상의 이익을 노동자에게 시간으로 돌려주고, 노동시간에 대한 결정권을 노동자와 사회가 나눠 갖게 합니다. 같은 '노동시간 단축'이라도 앞의 것은 개혁주의적 개혁조차 아니고, 뒤의 것은 비개혁적 개혁이 될 수 있습니다. 신당이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할 때 임금 보전과 교섭 절차를 함께 제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당에 대한 함의. 고르의 '누가 결정하는가' 기준은 신당의 정책 설계에 구체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1. 대중교통 무상화: 국가가 위에서 결정해 주는 개혁이 되기 쉽습니다. 모두의 카드처럼 요금을 지원하는 방식은 이용자를 수혜자로 남깁니다. 이것을 비개혁적 개혁으로 만들려면, 이용자와 운전 노동자가 노선·배차·서비스 결정에 참여하는 공영제 구조와 결합해야 합니다(16장, 17장의 버스 공공성 법안).
  2. 세입자 조합의 교섭권: 세입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권력을 만든다는 점에서 고르의 기준을 가장 잘 충족합니다(17장의 임차인단체법). 임대료 상한 같은 정부 규제는 정책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지만, 세입자 조합은 정책이 바뀌어도 남아 세입자의 이익을 지킵니다.
  3. 공공 돌봄: 돌봄을 국가가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개혁주의적 개혁에 머물 수 있습니다. 돌봄 노동자와 이용자가 공공돌봄센터의 운영에 참여하는 구조를 둘 때 비개혁적 개혁이 됩니다.
  4. 실행 과제: 정책마다 '누가 결정하는가' 점검. 신당은 모든 정책 공약에 대해 '이 정책이 실현되면 누구의 결정 권한이 커지는가'를 점검하는 절차를 둡니다. 정책의 수혜자가 결정의 주체가 되는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것이, 신당의 정책을 민주당의 유사 정책과 구분하는 핵심 차이가 됩니다.

10.4 풀란차스와 밀리밴드: 국가와 민주적 사회주의 전략

좌파가 선거를 통해 정부를 맡으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결국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1960-1970년대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이 질문을 둘러싼 대표적 논쟁이 랄프 밀리밴드와 니코스 풀란차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밀리밴드의 국가론. 랄프 밀리밴드(『The State in Capitalist Society』, 1969)는 영국과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경험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 엘리트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고위 관료, 판사, 군 지휘부, 중앙은행 간부 같은 국가 엘리트가 기업 엘리트와 같은 사회적 배경(사립학교, 명문대학, 상층 가정)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개인적 연결망으로도 얽혀 있다는 점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국가는 형식적으로는 중립적이지만, 실제로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위해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밀리밴드는 노동당 같은 개혁 정당이 선거로 정부를 장악해도, 국가 기구 안의 엘리트와 자본의 압력 때문에 근본적 개혁을 이루기 어렵다고 분석했습니다.

풀란차스의 비판과 관계적 국가론. 니코스 풀란차스는 밀리밴드와의 논쟁에서 그의 접근이 국가를 개인 엘리트의 문제로 환원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풀란차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 엘리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위치였습니다. 국가 엘리트가 노동자 출신이라도, 국가가 자본의 축적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는 자본의 이해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풀란차스는 후기 저작(『L'État, le pouvoir, le socialisme』, 1978)에서 이 관점을 발전시켜, 국가를 지배계급의 도구도 아니고 계급 위에 선 중립적 기구도 아닌, 계급 세력 관계가 응축된 장으로 정의했습니다. 국가 안에는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투쟁도 새겨져 있습니다. 노동법, 사회보장, 공교육 같은 제도는 노동자 투쟁의 결과로 국가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또 국가 기구들 사이에는 균열과 모순이 존재합니다. 재무부와 복지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법원과 행정부는 서로 다른 이해와 논리를 가지고 부딪칩니다.

메커니즘: 민주적 사회주의로 가는 길. 풀란차스는 이 국가론에서 전략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모델을 모두 비판했습니다.

  • 국가 외부에서의 장악 모델: 국가를 외부에서 한 번에 장악하고 해체한 뒤 새로운 권력 기구(평의회 등)로 대체하는 레닌주의 모델은, 서구 민주국가에서 대중의 동의를 얻기 어렵고, 대의제와 시민적 자유를 없애 권위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 국가 내부의 점진 개혁 모델: 선거로 정부를 맡아 국가 내부에서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국가 기구에 흡수돼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풀란차스가 제시한 대안은 두 가지 투쟁의 결합이었습니다. 하나는 국가 내부의 투쟁, 즉 선거와 의회, 행정 기구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국가 외부의 직접민주주의, 즉 자주관리, 사회운동, 노동자·주민 조직을 키우는 것입니다. 제도 안의 개혁이 제도 밖의 대중 권력에 의해 지탱되고, 제도 밖의 대중 권력이 제도 안의 개혁을 통해 확장되는 이중 운동입니다. 풀란차스는 이를 '민주적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불렀고, 이 구상은 1970년대 유럽 좌파의 전략 논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배경: 독재의 붕괴와 민주적 이행. 풀란차스가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을 고민한 1970년대 중반은 남유럽의 독재 정권들이 무너지던 시기였습니다. 풀란차스는 『독재의 위기』(1975)에서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의 독재 붕괴를 분석하며,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대중운동과 국가 기구 내부의 균열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살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후기 국가론, 즉 국가를 세력 관계가 응축된 장으로 보고 국가 내부의 균열을 투쟁의 기회로 보는 관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경험도 국가 기구 내부의 균열과 대중운동의 결합이 체제를 바꾼 사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근거와 비판. 밀리밴드와 풀란차스의 논쟁은 국가론의 고전적 논쟁으로 남았습니다. 이후 연구자들은 두 관점이 서로 배타적이라기보다 보완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가 엘리트의 구성(밀리밴드)과 국가의 구조적 제약(풀란차스)이 함께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풀란차스의 전략에 대해서는, 국가 내부와 외부의 투쟁을 결합한다는 원칙은 설득력이 있지만, 두 투쟁 사이의 긴장, 예를 들어 정부를 맡은 좌파 정당이 사회운동의 요구와 충돌할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답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한국 적용. 한국의 경험은 두 이론가의 통찰을 모두 보여줍니다.

  • 밀리밴드의 통찰: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에도 원청 431곳 가운데 8곳만 교섭에 나섰습니다(4장). 법이 바뀌어도 기업과 행정, 법원의 해석과 관행이 개혁의 이행을 늦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풀란차스의 통찰: 동시에 이 법 자체는 오랜 하청 노동자 투쟁의 결과로 국가 안에 새겨진 제도입니다. 국가는 투쟁의 장이며, 법의 이행을 둘러싼 투쟁은 계속됩니다. 2026년 헌법재판소의 봉쇄조항 위헌 결정도 국가 기구의 한 부분(헌법재판소)이 소수정당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다른 부분(국회가 만든 선거법)을 바꾼 사례로, 국가 기구 사이의 균열이 투쟁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방정부라는 국가 기구. 풀란차스의 국가론은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에도 적용됩니다. 지방정부는 국가 기구의 일부이지만, 중앙정부와 다른 이해와 권한을 가지며, 그 사이에는 균열이 있습니다. 신당의 기초의원은 이 국가 기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조례를 발의하고, 예산을 심의하고, 행정사무감사로 행정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공조달에서 노동권을 지키는 기업을 우대하는 조례, 공공임대와 세입자 지원을 확대하는 조례, 송전망 사업의 주민 협의를 강화하는 조례는 중앙 법률이 바뀌기 전에도 지방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습니다. 풀란차스가 말한 '국가 내부의 투쟁'은 국회만이 아니라 지방의회에서도 벌어지며, 의석이 적은 신당에게는 오히려 지방의회가 먼저 열리는 무대입니다.

신당에 대한 함의.

  1. 의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밀리밴드와 풀란차스의 논쟁에서 신당이 얻는 실천적 결론은 같습니다. 의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의회 밖의 조직된 힘이 의회 안의 개혁을 지탱해야 합니다. 신당이 의석을 얻어 법안을 발의하더라도(17장), 그 법안이 통과되고 이행되려면 원청교섭을 요구하는 하청 노동자, 임대료 상한을 요구하는 세입자 모임, 송전망 대책위의 힘이 필요합니다.
  2. 이행을 감시하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법의 통과는 투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시작입니다. 신당은 통과된 법의 이행을 감시하는 구조, 예를 들어 원청교섭 이행 현황의 정기 조사와 공개, 이행강제금 같은 강제 수단의 입법(17장)을 함께 추진해야 합니다.
  3. 국가 기구 사이의 균열을 활용합니다. 헌법소원, 행정소송, 지방정부의 독자적 조례처럼 국가 기구 사이의 균열을 활용하는 제도 투쟁은, 의석이 적은 신당이 쓸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입니다(8장의 제도 투쟁).
  4. 제도 안과 밖의 긴장을 다룰 절차를 둡니다. 신당이 지방정부나 국회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면, 제도 안의 타협과 운동의 요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 긴장을 다룰 절차, 즉 운동 단체와의 정기 협의, 타협안에 대한 당원 토론을 미리 마련해야 풀란차스가 말한 이중 운동이 분열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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