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necdote - 예술은 이름으로 시작인가, 완성인가.

Fountain(1917) - R.Mutt
1917년 4월 10일, 독립미술가협회 사무실에 조아한 서명이 적힌채로 어느 한 변기가 배송된다.
당시 협회가 개최 중이었던 전시회는 특이하게도 심사위원도 심사과정도 없이 소정의 비용만 지불하면 누구든지 출품과 전시가 가능한 기획으로 해당 변기 역시 출품을 위해 제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기성품(레디메이드)에 어떠한 정보도 식별되지 않는 R.Mutt라는 이름만이 서명되어 날라온 이 흉물은 일종의 반달리즘으로 취급당해 협회에서 거부당했다.
R.Mutt의 서명이 적힌 변기는 전시회 기간 동안 그 누구도 작품이라 생각하지 못할 방식으로 후미진 곳에 방치되었고 전시회의 종료, 정리과정에서 분실되어 사라진다.

Duchamp, Marcel. "The Richard Mutt Case." The Blind Man, no. 2 (May 1917): 5.
이러한 소동이 벌어진 한달 뒤에 다다이즘 잡지, 'The Blind Man'에 한 글이 게재된다.
작품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변기에 대한 평론 혹은 변론이 담긴 해당 글은 훗날 R.Mutt가 마르셀 뒤샹이라고 밝혀지는 것을 생각하면 일종의 자기변론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뒤샹이 던진 화두는 단순한 자기변론에서 멈추지 않고 레디메이드 장르와 개념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닌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예술은 개인의 경험, 특히 미적인 경험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뒤샹의 말은 현재까지도 여러 담론과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해낸 뒤샹의 방법론이다.
뒤샹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오브제를 고르고 '이름'을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이름이 단순한 반달리즘으로 남을 수 있었던 흉물을 작가의 의도가 담긴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The Anecdote(2015) - E SENS
이러한 이름이 가지고 있는 힘은 한국 힙합의 금자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The Anecdote, 이센스의 옥중앨범으로 2015년에 발매된 이 앨범은 26일이라는 짧은 시일동안 작업되었다.
한국힙합에서 앨범 단위의 작업물로써 가장 완성도가 높은 앨범 중 하나로 꼽히며 공고한 위상을 지키고 있는 앨범의 작업과정이라기엔 상당히 촉박한 일정에서 제작된 것이다.
Writer's Block (2015) - E SENS
10.18.14 (2015) - E SENS
이러한 촉박한 일정은 앨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생각이 언어로 정제되기 전에 이미 작사를 시작해야했던 일정은 이센스가 가사 속에 자신을 감출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정제된 언어가 아닌 있는 원초적인 감정으로 쓰여진 가사들은 아티스트가 아닌 인간 강민호의 모습을 그 어느때보다 순전하게 담아내고 있다.
주사위 (2015) - E SENS
The Anecdote (2015) - E SENS
이센스는 원초적인, 피상적인 감정만을 담아낸 곡만으로 앨범을 채우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에 대해서 숨김없이 가사로 적어내며 마음이 열렸던 것일까?
언더씬에서 데뷔할 당시부터 소위 난 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슈프림 팀으로 오버에서도 성공한, 누구나 인정하는 래퍼였기에 할 수 없었던, 하기 싫었던 이야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털어놓기 시작한다.
발매 이후 한 번도 라이브 무대를 가진 적 없는,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담아낸 'The Anecdote'와 같은 곡들은 래퍼가 아닌 인간 강민호를 보여준 한국 힙합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곡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각자가 너무나도 뛰어난 트랙인 것과 별개로 앨범이라는 하나의 플랫폼에 묶이기엔 각자의 개성이 너무나도 강한 동시에 서사적으로도 이어지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떨어져있는 모습이었다.

장르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정규 앨범이라는 포맷에 어울리지 않는 구성으로 보였던 트랙들은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되며 뚜렷한 하나의 선으로 묶인다.
Anecdote, 개인적인 일화 혹은 진술을 의미하는 단어로 정의되자 별개의 시점, 별개의 사운드로 흩어져있는 것처럼 보였던 10개의 트랙이 이센스가 살아오며 쌓인 일화,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로 앨범의 테마가 정립된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시점들은 이센스의 가장 강렬한 일화가 되었고 개성적인 사운드들은 BANA의 A&R과 이센스 특유의 래핑이 합쳐져 발화자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The Anecdote'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동시에 한국 힙합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앨범이다.
아티스트의 커리어를 평가할 때 앨범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동시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래퍼들에 대한 환상 혹은 재평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어떠한 혁신이나 변화가 아닌 오롯이 압도적인 완성도 하나로 씬의 게임체인저 역할을 해낸 괴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 거란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이름 역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명명(命名)은 단순히 단어를 부여하는 행위를 넘어 대상이 어떤 의미로 기억될 것인지를 규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The Anecdote'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이야기가 한국 힙합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로 기억되어야 하는지까지 제시했다.
명명(命名)이란 작품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넘어, 그것이 무엇으로 기억될지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창작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에게 또 어떠한 이름들이 기억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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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XXXXXp너무 날것이고 무겁기에 그나마 밝은 톤의 writers block 같은 트랙은 종종 찾아듣지만 앨범째로 돌려본건 정말 오래전인것 같음
- 쵸X중간에 The Anecdote가 떡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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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X주진짜 숨이 턱 막힘
- 힙X이 평이 내 평과 가장 비슷하네 ㅇㅇ
- 풋XXXXX4난 한번 허들 넘으니까 자주 들러도 무겁다는 느낌은 못 받았는데 친구들 중에서도 너무 무거워서 잘 못 듣겠다는 이야기 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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