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만남이었던, 케빈 키건을 떠나보내며.

케빈 키건이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4기라고 했었나. 그래도 지난달이었나 치료 경과가 매우 좋았다고 밝힌 인터뷰를 보면서 조금은 안심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사실 내가 케빈 키건이라는 축구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시간은 길지 않다. 매우 짧다고 해야 정확하려나.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키건을 추모하기 위해 글을 따로 하나 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며, '바르셀로나 스타일'(물론 예외도 있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자)의 클래식 플레이어들을 좋아하는 한 사람. 이것이 해외축구에 관련한 나의 프로필인데 케빈 키건이라는 선수와는 정말 동떨어진 것 아닌가.
유나이티드의 최대 라이벌인 리버풀의 레전드로서 유럽을 정복하고, 분데스리가를 제패하며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일한 발롱도르 2회 수상자가 된 레전드 공격수. 그리고 감독이 되어서는 뉴캐슬의 지휘봉을 잡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치열한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을 펼친 적장. 그러니까 맨유의 적으로만 마주친 사이. 키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문구를 쓴다면 이게 전부였다.
좋은 쪽으로만 말한다면 그랬다.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미미한 활약만을 남긴 저주받은 세대의 에이스, 크리스마스 이후 거짓말처럼 붕괴된 팀을 지휘하던 역사에 남을 패장이라는 수식어를 쓸 수도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더 빠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쪽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경의 언론플레이에 말려들면서 압박감에 내뱉은 "I'd love it if we beat them"이라는 표현 하나로 정리되지 않을까.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추락, 그리고 SNS 상의 '밈'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도 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조롱거리로 소비되곤 하는 뉴캐슬의 감독 키건. 이것이 키건에 대한 단상이었다. 모종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케빈 키건이라는 선수가 내게 특별한 선수로 다가온 시점은 작년이었다. 레전드 선수들의 한 경기 모든 볼터치를 모아 편집한 영상을 올리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당연하게도 조회수는 많이 나오지 않았고 구독자도 거의 늘지 않았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키건의 경기 영상이 무수한 구독자를 끌어모으며 채널이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대박. 유튜브 채널 '개국 공신'인 셈이다. 취미로 시작한 채널이긴 하지만 구독자가 천 명을 넘으니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가. 이게 키건과 나의 '뜻밖의 만남'이었다.
사우스햄튼 소속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박살냈던 1981/82 시즌 경기다. 10만에 가까운 조회수, 그리고 무수한 댓글들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편집을 따로 특별하게 했다기보다는 키건이 펼친 경기 자체가 재미있었으니까 알고리즘에 뜬 거겠지! 커리어 최고의 골이라 해도 무방한 시저스킥을 성공시켰지만, 당대의 애매한 오프사이드 규정으로 인해 아쉽게 취소된 골이 터진 경기다. 그 골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키건은 기어코 골을 넣으며 사우스햄튼에게 승리를 안겼다.
그리고 아마도 케빈 키건이라는 선수의 커리어를 상징하는 경기일지도 모르는 리즈와의 1974년 채러티 실드.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더티한 축구를 한다기에 '더티 리즈'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리그 최강팀 리즈는 키건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조니 자일스', 그리고 '빌리 브렘너'는 키건을 끝내 폭발에 이르게 했다. 그래서 탄생한 '레전드' 사진이 바로 위의 썸네일.
이 영상은 지금 무려 32만의 조회수를 넘기면서 꾸준하게 클릭을 유도했던 영상이다. 영상 속에는 자일스에게 엘보우를 맞는 키건은 존재하지만 사진처럼 브렘너에게 펀치를 날리는 키건은 없다. 많은 이들이 펀치 장면이 영상에 없는데 영상 제목이 'punched'라는 게 말이 되느냐, 완전 사기라는 댓글을 남겼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기꾼, 어그로꾼이 된 느낌.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본 영상에 없는데. 펀치를 날린 거는 사실이니까.
전설적인 썸네일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사진작가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많은 조회수를 끌어모으게 됐다.
정말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유,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이유로 키건이라는 선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도 한 선수를 좋아하게 될 수 있구나.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달까? 아무튼 그렇게 키건의 영상을 많이 제작하게 되었고 지금은 플레이리스트에 22경기를 올려놓게 됐다. 꽤 많이 만들지 않았나?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J6SDZRiVFEtZ4WpsfakFMAJ3Zsxtr9x8&si=k9DGRBgYgsrmXGt8
이후 키건이라는 선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면서 선수나 감독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전거 경주에서 자빠지는 영상을 보고 폭소하기도 했고.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근육을 자랑하며 경합을 꺼리지 않는 '마이티 마우스'다운 플레이스타일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브렘너 펀치 사건처럼 각종 스캔들을 몰고 오는 당대의 아이콘이었던 키건은 역사적인 이적 사가의 주인공으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무려 세 번씩이나! 1976/77 시즌 리버풀에게 빅이어를 안기며 유럽 정상에 서자마자 분데스리가 6위에 불과했던 함부르크로 이적하는 충격적인 결단을 내렸던 것이 첫 번째다. 물론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잉글랜드를 떠나 라이벌 독일로 이적, 잉글랜드인들에게 굉장한 욕을 얻어먹었던 키건이다. 함부르크에서도 초반에는 순탄치 못했는데 브렘너를 때렸던 것처럼 상대 선수의 턱을 주먹으로 가격해서 8주 출전 정지를 당했다. 팀 내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고 말이다.
시련을 이겨내고 함부르크의 분데스리가 정복을 이끈 키건은 다시 팬들을 경악케 했던 이적을 감행한다. 1979/80 시즌 도중 함부르크를 떠나기로 결정한 키건은 거함들의 관심을 받았다.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등...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받은 유럽 최고의 선수였기에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클럽은 사우스햄튼이었다. 유베, 레알, 바르샤를 거르고 사우스햄튼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적이었으며, 이는 사우스햄튼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스페인, 이탈리아보다 잉글랜드가 더 적합한 환경이라 여겼기 때문에 편안한 남부 해안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키건은 사우스햄튼에 그저 육아를 위해서만 온 것은 아니었다. 축구적으로도 여전히 높은 목표를 그리고 있었다. 키건은 중위권 사우스햄튼의 성적을 드라마틱하게 바꿔놓지는 못했으나, 1981/82 시즌 리그 26골을 터뜨리며 리그 득점왕, PFA 올해의 선수상을 석권하는 전설적인 시즌을 보냈다.
유럽 최강의 팀에서 독일의 6위 팀으로. 독일의 6위 팀을 유럽 정상을 노리는 팀으로 만들어놓고는 잉글랜드 중위권 팀으로. 이 두 번만 해도 미쳤다는 생각이 들 테지만 하나가 더 있다. 1981/82 시즌 커리어하이라 해도 좋은 훌륭한 시즌을 보낸 키건은 고질적인 수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우스햄튼에 실망했고,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남부 해안을 떠나 맨 위쪽으로 올라갔다. 키건은 북부의 뉴캐슬 이적을 선택했다.
그 뉴캐슬이 당시에는 2부리그에 머물러 있던 팀이란 말이다. 1부리그 MVP와 득점왕을 석권한 시즌을 보내자마자 2부리그로 자진해서 간다고?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이 인연으로 나중에 뉴캐슬의 감독을 맡기도 하며 구단의 레전드로 거듭났다. 상식에서 동떨어진, 즉흥적인 결정들을 참으로 많이 내렸던 키건은 은퇴조차 즉흥적이었다. 친정팀 리버풀과의 FA컵 경기에서 준족의 수비수 '마크 로렌슨'을 상대로 맥없이 공을 빼앗기자 그 즉시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비록 리버풀에게는 졌지만 키건은 은퇴시즌에도 참 잘했다. 1983/84 시즌 키건은 2부리그에서 27골을 터뜨리면서 뉴캐슬에게 승격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안겼다.
발롱도르를 두 개나 받은 선수가 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욕먹겠지만, 키건의 커리어는 뭔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잉글랜드의 주장으로서 국제대회 실패만을 경험했고, 당찬 포부를 외치며 합류했던 사우스햄튼에서도 결국 팀적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리버풀과 함부르크에서는 리그를 정복했으나 정작 키건이 떠난 후 그를 그리워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리버풀은 그의 대체자로 '케니 달글리시'라는 거물을 영입했고, 함부르크는 더 강력한 팀을 만들어 마침내 그가 이루지 못했던 유러피언컵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분명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비극적인 그림자가 따라다니던, 오묘한 엔딩만을 써내려온 키건. 다른 축구영웅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가지는 그만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 같다. 또한 경직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느끼기에 감정에 솔직한 행동을 하고 충격적인 이적을 감행한 결단력, 반골 기질도 그를 매력적인 인간으로 만든 듯하다. 키건처럼 무대뽀로 살아보고 싶달까.
갑작스레 별세 소식을 접해 횡설수설 이야기가 길었다.
나중에 올리려고 했는데, 미리 만들어놨던 키건의 경기 영상들을 다시 올려보도록 해야겠다. 케빈 키건의 전설이 오래오래 기억되는 데 미약하게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언젠가 케빈 키건의 남아있는 경기 모두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는 글도 남길 수 있기를. 불가능한 목표는 전혀 아니기에...
Rest in Peace, King Kev.
🔥 실시간 네티즌 베스트 반응
- 기X랑RIP 킹케브 당신덕분에 리버풀 뉴캐슬이 빛날수있었습니다
- 2XXaRIP 케빈 키건의 플레이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영상으로 확인만해도 엄청난 선수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리버풀과 좋지않은 이별을 했다고 하더라도, 리버풀을 빛내줘서 감사했습니다. 붉은제국의 기반을 닦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행복하시길
- 텐X개추.
- AXXX3좋은 글이네요.시공간을 뛰어넘어 한 클래식 팬의 마음에 와닿은 과정을 보여준달까...전 원래 키건 헤이터에 가까운 포지션이었는데 치달님 글 보면서 키건에 대한 생각을 재고할 기회를 얻었던 기억이 나네요. 리버풀이나 함북 시절 모습만 깔짝 알았는데 사우스햄튼이나 뉴캐슬에서 커리어 내내 조금씩 변화해나간 모습도 볼 수 있었고요.나이든 잉글 팬들에게도 사실 공정한 평가를 받는다고 보기 힘든 선수인데, 유튜브 채널도 그렇고 작지만 작지 않은 일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압XX교잘 읽고 갑니다
- 티X나자기 자신이 가시밭길을 선택한 선수랄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 아XXXXX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피XXXX딘1976/77 시즌 리버풀에게 빅이어를 안기며 유럽 정상에 서자마자 분데스리가 6위에 불과했던 함부르크로 이적하는 충격적인 결단시련을 이겨내고 함부르크의 분데스리가 정복을 이끈 키건은 다시 팬들을 경악케 했던 이적을 감행한다. 1979/80 시즌 도중 함부르크를 떠나기로 결정한 키건은 거함들의 관심을 받았다.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등...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받은 유럽 최고의 선수였기에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클럽은 사우스햄튼1부리그 MVP와 득점왕을 석권한 시즌을 보내자마자 2부리그로 자진해서 간다굉장히.. 특이한 이적 이력을 가지고 있네큰 클럽보다는 도전을 원하는 사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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