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암울한 유엔군의 구원투수 리지웨이, 그는 누구인가?
전편: https://www.fmkorea.com/10204709708
"월튼 워커 중장 사망"
암울한 전황 속에서 미 8군을 이끌었던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순직하게 됨. 안 그래도 중공군이 서울로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 중요한 지휘관직이 공석이 되자 맥아더는 급히 유능한 후임자를 구해야만 했음. 맥아더는 이전부터 자신이 밑에 두고 싶었던 그 사람을 후임에 임명하고 싶었고,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빨리 그 사람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함. 그와 동기이자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콜린스 장군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미 8군을 맡게 되었다는 말을 하게됨. 이 두 사람이 그토록 찾던 사람의 이름은 "매슈 벙커 리지웨이 Matthew Bunker Ridgway" 였음.

그는 과연 누구길래, 맥아더가 콕찝어서 그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까? 그의 행적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그는 군인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가 포병 장교였고, 자연스럽게 그도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음.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고 1917년에 졸업하게 됨. 통칭 별들의 기수라고 불리는 1915년 졸업생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오마 브래들리 장군의 2년 후배임. 이 기수또한 2차대전에서 여러명이 장군으로 활약하게 됨.
워낙에 강직하고 일처리를 잘해서 주변인들이 그를 높게 평가했고, 이는 나중에 그가 2차대전에서 쾌속진급하는 밑거름이 됨. 리지웨이를 높게 평가한 사람이 둘이 있었는 데 그게...


맥아더와 마셜이었음
리지웨이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스페인어 교관으로 근무한 적이있는데 당시 학교장이었던 맥아더의 명령으로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체육 프로그램을 제작 및 감독함. 이때 일처리를 똑부러지게 잘해서 맥아더가 리지웨이한테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됨. 그 이후로도 여러 곳에서 잘 근무하다가 조지 마셜의 눈에 들어서 2차대전이 터지자 마셜 휘하의 참모부에서 근무하게 됨.
하지만, 리지웨이는 참모 보직보다는 지휘관직을 원했고, 마셜 역시도 리지웨이가 참모직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 중령이었던 리지웨이를 단숨에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실험용 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함(참고로 그 당시 사단장은 오마 브래들리). 이 부대의 이름이 바로....

미국 최초의 공수부대인 제82공수사단이었음.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 팔슈름예거의 활약으로 전 세계적으로 공수부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마셜은 유능했던 리지웨이에게 이런 실험적인 성격의 부대를 맡긴거임. 리지웨이는 82공수사단을 강하게 훈련시켰고 1942년에는 오마 브래들리가 전출가면서 소장으로 진급하고 사단 지휘권을 인수하게 됨. 1943년에는 시칠리아 침공에 처음 투입되었고 만족스러운 전과를 거둠.

이듬해 리지웨이는 82공수사단을 이끌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함. 여기서도 독일군 후방에 부대원들과 함께 강하해서 후방 교란을 성공적으로 수행함. 이 공적으로 새로 창설된 제18공수군단장으로 영전함. 82공수사단을 넘어서 리지웨이는 유럽 전선 내 미군의 모든 공수부대들을 지휘하게된 리지웨이는 이후에 마켓 가든 작전, 독일 본토 침공 등에 참가해서 큰 활약을 펼침.

(2차 대전 당시 로턴 콜린스 7군단장, 버나드 몽고메리 21집단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18공수군단장)
유명한 총통의 소방수이자 방어전의 마스터인 발터 모델 원수에게 항복 권고를 한 미군 지휘관이 바로 리지웨이였음(모델은 거부하고 자살). 독일 본토 침공에서는 전선을 시찰하다가 독일군 수류탄 공격에 부상을 입기도 했음.
독일이 항복하자 리지웨이와 제18공수군단은 곧바로 미 본토로 귀환해서 몰락 작전을 준비하지만,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일본이 원폭을 맞고 항복함. 참고로 맥아더는 사관학교 시절 인연과 유럽전선에서 그의 명성때문에 리지웨이를 미주리 항복 서명 당시에 참석시키려했지만, 리지웨이는 자신은 태평양에서 싸운적이 없다고 공손하게 거절함. 이듬해 그는 중장으로 진급함.
리지웨이는 6.25 전쟁 당시에 미 육군 작전·행정참모부장이었음. 전쟁 계획에 대한 조언과 군수물자 생산을 담당하면서 전쟁 후방에서 유엔군을 돕는 역할을 맡던 와중에 맥아더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가게됨......

"나의 한국전쟁 개입은 한 발의 총성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 워커의 후임으로 급파될 당시의 느낌을 떠올린 리지웨이의 소감
전쟁 발발 반년. 전황은 최악이었음. 유엔군은 1950년 8월 낙동강에서 버티고, 9월 인천으로 상륙해 전세를 뒤집은 뒤, 10월 초 38선을 돌파해 쾌속 북상했었음. 하지만, 10월과 11월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두 차례 공세를 얻어맞고, 12월 평양, 개성을 차례로 내줌. 이때 참전한 역사학자 시어도어 페렌바크의 말처럼 “한 번 시작된 후퇴는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었음.
흔히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까지 밀린 1950년 8월을 6.25 최대 위기로 아는 이들이 많음. 남은 영토 면적(한반도 10%) 측면에선 그럴 수 있지만, 수뇌부의 의지나 군대 사기 측면에서 최악의 시점은 1950년 12월 말(38선 이북 포기)부터 1951년 1월 초(서울 재철수)였음.
우선 미국 정부와 미군 지휘부가 전쟁 의지를 접은 상태였음. 1951년 1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에게 보낸 서신은 절망적임. “치명적 손실을 피하기 위해 대피가 명백히 필요한 상황이면, 귀관 판단에 따라 한국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라.” 미국 국내 사정도 나빴던게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 개입을 법안으로 지원하던 민주당이 195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하자, 의회는 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음.
게다가 미국의 동맹국들도 미국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음. 특히 영국 총리 애틀리가 트루먼에게 이 전쟁은 소련에게만 이로운 전쟁이니 한반도를 포기하고 유럽에 집중할 것을 권유함.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 자유낙하 하던 순간, 리지웨이가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급파됨. 버티느냐, 끝나느냐.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운명이 리지웨이 양 어깨에 걸려 있었고......
리지웨이는 싸우기로 결심함.

(리지웨이는 사단장 시절부터 전장에 갈 때 가슴에 수류탄을 차고 다녔음. 왜냐하면 지휘관은 전장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게 그의 원칙이었음. 그러면 여러 위기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있는데, 그때 마다 수류탄을 써서 위기를 벗어난 적이 여러번 있었음)
당시 미 육군에선 장교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은 리지웨이만큼 잘 하는가?', '리틀 리지웨이로 부를 인물인가’라는 기준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이 전쟁 지역 지상군 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카드였음.
1950년 12월 23일 오후(한국시간) 인사 통보를 들은 리지웨이는 당시로선 기록적인 속도로 한국에 날아옴. 하루 만에 워싱턴을 출발, 12월 26일 0시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고, 당일 오전 9시 30분 맥아더와 면담. 2시간 반 후 다시 도쿄를 출발, 26일 오후 4시 8군사령부가 위치한 대구에 도착. 27일 새벽엔 서울로 날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함.
리지웨이의 부임 과정은 속도, 내용 모두에서 완벽했음. 강행군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워커 여사를 찾아 조의를 표하고 위로한 것. 한국으로 이동 중에는 미 8군 장병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고, 한국 도착 직후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연락해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함께 싸워야 한다”며 용기를 불어넣어줌.
서울 도착 당일 이승만 대통령과 대화에선 미국에 대한 불신(철수 가능성)을 없애려고 노력했는데, 리지웨이는 이 대통령에게 ‘철수를 위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함. 회고록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촉촉하게 눈이 젖은 고령의 전사 손을 잡고’ 신속히 부대를 정돈해 다시 공세로 나설 것이라고 밝혔고 이것은 이승만이 가장 원했던 대답이었음.

패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리지웨이는 취임 즉시 최대한 많은 부대를 직접 방문함. 통상 리지웨이 같이 이름난 리더가 침몰하는 조직의 구원투수로 투입되면, 자기 선입견이나 성공사례에 기반해 조직의 체질을 뜯어고치려고 들기 마련이지만, 리지웨이는 편견을 완전히 빼고, 직접 본 것으로만 판단하려고 했음. 이 점이 리지웨이가 다른 장군들과 다른 부분이었음.
1950년 12월 27일 오전 이승만을 만난 리지웨이는 오후부터 전방부대를 돌았음. 이날에만 미1군단, 영국29여단, 미25사단, 국군1사단, 미9군단을 순시했는데, 경비행기, 헬기, 지프를 계속 갈아타며 순시를 멈추지 않았음. 다음날엔 후방 경주에 있던 미10군단까지 찾아갔음. 48시간 동안 8군 예하 모든 군단장과 사단장(동해안 국군 수도사단만 제외)을 만나, 최악의 상황을 현장 지휘관 입으로 직접 들었음. 왜 패배했는 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일선부대를 순시한 리지웨이는, 그제서야 왜 세계 최강 미군이 장비도 보급도 열악한 중공군에게 밀리는지 알 수 있었음.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독일·일본을 동시에 때려잡던 미군의 전투력과 군인정신은 5년의 평화와 군축을 거치며 녹슬어 있었음. 확신을 잃어버린 지휘관, 야전교범을 따르지 않는 장교와 부사관, 군기를 상실한 병사들만 있는 암담한 상황. 리지웨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국군과 미군 병사들을 이렇게 묘사했는데
"병사들은 여전히 어떠한 임무도 수행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확신이 없어 보였다"
리지웨이는 이런 군대를 다시 ‘싸우는 군대’로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을 직감했음.
리지웨이는 우선 3가지 조치를 즉시 취함.
1.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차질없이 충분히 공급할 것
2.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방한 장비를 충분히 구비하고 병사들에게 지급할 것
3.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쓸 편지지와 문구류를 병사들에게 보급할 것
이러한 사소한 조치들이 뭐 중요하냐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리지웨이의 생각은 달랐음. 추위, 배고픔, 외로움 같은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과 불만 사항을 해결해주지 못하면, 병사들의 가장 기초적인 자질인 정신력과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 리지웨이의 철학이었음.
리지웨이는 자신의 손에 가장 중요한 국가의 자산, 즉 부모들의 눈에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젊은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음. 리지웨이는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김
"전쟁터에서는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장군이 전사한 것이나 소총수 하나가 쓰러진 것이나 똑같이 귀한 목숨입니다. 각 개인의 존엄성이야말로 문명의 기초라는 사실을 지휘관들은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리지웨이는 전장을 최대한 가까이서 직접 확인하고자 했음. 1.4후퇴 이후 북진을 모색하던 1951년 1월 24일, 얼 패트리지 미5공군사령관(소장)이 조종하는 2인승 훈련기를 타고 전선에서 32㎞ 지점까지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지상 상황을 관찰했음.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던 당시도 장군 두 사람만 소형기를 타고 적진을 정찰하는 건 웬만한 배짱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리지웨이는 강행혔고, 다음날 유엔군은 청천강 전투 이후 처음으로 역공을 시작했음.
두 달 후인 3월 23일 미 187공수연대전투단이 파주 문산에서 공수작전을 할 때도, 리지웨이는 상황을 보러 경비행기를 타고 최전방에 착륙한 일화가 있는데, 병력이 가득한 맨땅에 내리기 위해 리지웨이가 탄 비행기가 다섯 번이나 앞뒤를 왔다 갔다 해야 했음. 리지웨이가 비행기에서 내려 병사들을 만났을 때, 사살된 중공군이 아직 피를 흘리고 있을 정도로 전투 상황이 급박했음.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공수사단장으로서 직접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리지웨이에게, 이 정도는 흔한 현장 지휘였음.
"리지웨이 사령관은 사령부를 비우고 최전선 부대를 따라다니며 천막에서 살았다. 위급할 때 지휘관은 최대한 전선 가까이 붙어야 한다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 백선엽 장군의 회고
전투 여건을 보장한 리지웨이는 다음 단계를 밟음. 살면서 ‘코리아’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미군 병사들은 왜 자신들이 이 작은 동양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음. 리지웨이는 그걸 납득시켜야만 이길 수 있다고 봤음.
리지웨이는 1월 21일 전 장병에게 지휘서신을 하달했는데,
"미군 병사들은 자랑스러운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써 ‘왜 우리가 여기 있는지’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알 권리가 있고, 자신은 병사들을 책임질 지휘관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할 의무가 있다"
라는 말과 함께 설명을 시작함. 미군 투입 이유에 대해서는 “합법 절차를 거쳐 구성된 정부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고, 군인으로써 이 이상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며 군의 문민통제를 강조함. 싸우는 이유에 대해선 “서구 문명이 공산주의를 물리치느냐, 공산주의자들이 개인 권리를 신성히 여기는 사람들(자유주의자)을 지배하게 될 것이냐가 본질”이라고 규정함. 한국만의 싸움이 아니라 자유진영 전체의 생존이 걸린 전쟁이란 점을 부하들에게 일깨운 것임.
리지웨이는 언제나 수류탄과 구급낭을 가슴에 달고,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며, 부하들과 함께 걷기를 마다하지 않았음. 특히, 부대 시찰 때 절대 사열대에 오르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병사들을 봤음. 리지웨이는 그렇게 병사들 가까이에 있으면 “그들이 나에게 설문조사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뭔가(솔직한 이야기)를 말하게 된다”고 이야기함.
이를 두고 콜디스트 윈터의 저자 핼버스탬은 “리지웨이 리더십은 평등주의 시대에 좀 더 적합했다”고 평가함. 일반 지휘관들이 선호하는 훈시를 통해 정신력만 강조하는 구식 리더십이 아니라, 여건을 보장한 뒤 동기를 부여하고 같이 현장에서 뛰며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것. ‘동기 부여’와 ‘구성원에 대한 개별 배려’를 중시하는 현대 리더십 이론과도 일맥상통함.
"리지웨이의 긍정주의는 전염성이 있었다."
-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헨슨
리지웨이는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미 8군의 전투 의지를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촉박했음...

바로 리지웨이가 한국에 온지 5일만에 중공군의 3차 공세가 12월 31일 밤에 시작된 것...
중공군은 집요하게 국군을 집중공격해서 몇시간 만에 서울 방어선을 붕괴시켜버림. 리지웨이는 아직 유엔군의 사기가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고, 지금 무리하게 막다가 큰 피해를 입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 수원-원주 라인까지 크게 후퇴해서 적들을 뿌리치기로 결정함. 이게 바로 1.4 후퇴임.

서울을 차지한 중공군들은 크게 기뻐했고, 마오쩌뚱은 이미 전쟁을 이겼다고 떠벌리고 다닐 정도였음. 하지만, 그들은 몰랐음. 유엔군의 큰 변화를...
(다음편에...)
🔥 실시간 네티즌 베스트 반응
- 굴X비한국전쟁에서 우리한테 고마운 미군 장성 이야기하면 워커 밴플리트 맥아더에 비해 강철유두좌는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는거같은데 워커 중장이 갑작스럽게 사고사했고 전선도 어지러운 상황에서 급하게 구원투수로 올라와서 상황 수습해낸건 저 분들에 밀리지않는다고봄
- 초XXX기리지웨이가 맥아더 보다 확실히 나은점은, 유능했던것 외에도 민주주의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로 바람직한 군인상인 문민통제에 아주 충실한 장군이었다는 점임.전선에서 잘 싸우면서도 본국 정부가 원하는 방식의 전략대로 싸움. 맥아더처럼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작전을 짜지도 않음. 나중에 맥아더 뒤를 이어 UN군 총사령관 자리로 올라가게 되었을 때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미국 정부의 바람대로 현재 휴전선 정도를 유지하는 정도로만 전쟁을 수행했음.
- 클XX럭그래도 역덕들한테 한국전쟁 명장순위 물어보면 팽덕회랑 리지웨이를 탑티어에 두고 시작하긴 하지...
- 포XXXX교리지웨이의 능력은 리지웨이의 영전루트만 봐도 알수 있음.8군 사령관(워커사망 소방수) -> un군사령관 겸 GHQ사령관(맥아더 해임 후 후임) -> 나토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아이젠하워 대선 후보차출 후 후임) -> 미육군참모총장(최종보직)2차대전 이후 미군 사령관 초특급수퍼에이스의 행적이라 봐고 무방함
- 굴X비전에 한국전에서 중공군이 초창기에 기동전(그들 말로 운동전)하던 이야기 처음 봤을때 펑더화이 머리도 감탄스럽긴했고 주어진 자원을 활용해서 전략적 목표에 접근하는 과정을 보면 전통적인 의미에 명장에도 부합하는 면이 크다는거 부정할수없긴한데 갠적으로 그 자원이란게 인명갈갈이란건 곱씹을수록 뭔가 좀 묘함 펑더화이는.. 물론 이런 비판에 있어서는 마오쩌둥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지만서도[댓글이 수정되었습니다: 2026-08-14 16:26:22]
- 존XXX르전차와 포병 항공기가 빈약한 경보병군대였던 중공군에겐 선택지가 인력갈갈 당하고 패배하기vs인력갈갈해서 승리하기 두가지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펑더화이는 명장이 맞다고 생각함
- 굴X비나도 그런 시각은 절대 부정안함 결국 냉정하게 생각하면 군대에서 인력도 주어진 자원일 뿐이고 펑더화이 말고 다른 어중이떠중이면 그거 반에 반도 못하고 부하들만 포탄밥 만들어주고 졌을테니까 ㅇㅇ 근데 명장인 이유가 병력을 무식하게 갈아넣은게 아니라 스마트하게 효율적으로 갈아넣은거란게 뭔가 뭔가라는거지
- 방XX우근데 명장들 한국 미국 중국 쪽 사람들은 들었는데 북한쪽에도 군재 좋은 새끼 있었음?
- RXXXXXXl방호산?
- sXXXXnㅊㅊ!
- 6XXXX호1.4 후퇴 직전에 리지웨이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또다시!!!(6.25 개전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사수를 간곡히 부탁했고 리지웨이는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함. 하지만 뭐 현실은 서울사수는 현실적으로 유엔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것이라는 판단하에 빠르게 철수하는 쪽을 선택해서 전선을 안정화 시킴. 이 일화를 보면서 리지웨이가 상당히 정치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노련한 지휘관이었다는 생각을 하게됨.
- 마XXXXX스그에 비하면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진짜 고구마임....
- RXXXXXXl그 사람은 완전 무골이고 통치랑은 영 안맞던 양반이었던지라...
- 초XXX기우리 입장에선 한국전 후반에는 국군 전력도 올라왔고 서해에서 미 해군이 함포 빵빵 쏴주는 등 미군이 쪼금만 더 지원해 줬으면 연백평야 밀고 멸악산맥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음. 그럼 서울에 대한 압박도 지금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을 텐데근데 이미 극동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미국에 너무 많이 피를 흘려서... 누가 그 자리에 있었든지 제2의 맥아더급 에고를 가진 장군이 아니고서야 미국의 움직임에는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음.
- 아XXXX개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가 적법한 명령을 내렸으니 군인으로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진짜 감동적이네
- 꽃XXXX인처음엔 이름보고 중국장군인줄
- 디XXXX이유진킴은 어디갔지
- 尹X賀리지웨이 진짜 훌륭한 지휘관이네
- 쉐X드추천6 25가 왜 일어났는지?어떻게 전개 됬는지?우리나라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요즘도 6 25날 영상틀어주고교육 할려나??
- 尹X賀선생님 나이가?
- 하XXX러리지웨이 트롤한 중공군인줄 알았네
- 돼X룩마셜 이양반 위관때 상관들이 평가한 내용이 레전드임"빨리 마셜이 장군이 되어서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다" 군인이 이런 평가 받는건 진짜 어느정도로 일을 잘했을지 상상도 안감
- 익XXXXX다ㅊㅊ
- 타X어개재밌네
- 알X다마켓 가든은 망한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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