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의 신화에 대하여

분명히 강조하지만
이 글은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업적을 폄훼하려는 목적이 추호도 아님을 밝힘
그들의 업적은 이미 충분히 숭고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임
그러나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진 여러 신화들은 너무 과장되어있고
특히 그 신화가 어떤 목적을 위해 부풀려졌기에
그들의 진짜 업적까지 오염되고 평가절하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이 글을 씀

1.일가가 처분한 재산은 과연 600억(또는 2조원)에 달하는가?
우선 이 600억이란 숫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숫자임
조선 최고의 부자였던 이회영 가문이 2조원에 이르는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급히 처분하고
600억원이란 돈을 마련해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들을 양성했으나
그 600억원이란 돈이 무색하게 결국 그들은 파산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라는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스토리임
그러나 이 600억이란 숫자는 독립 운동이 신격화되며
발생한 꽤나 과장된 숫자고 또 계산법 또한 틀린 숫자임

우선 600억이라는 숫자를 만들어준 그들이 처분한 재산 40만원이라는 숫자에 대해 알아보자
우당 기념관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1969년대 잡지 신동아에서 40만원이라는 숫자를 보도했다고 함
그러나 1969년 신동아 잡지 1~12월호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런 기사는 찾을 수 없음

40만원이라는 숫자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1982년 7월 13일 매일경제 기사임
임호연이라는 사람이 쓴 글인데 이 사람도 독립운동가 출신임

그런데 최초로 이회영 가문이 처분한 자산 금액이 등장한 문헌은 1956년 5월 17일 경향신문임
이쪽은 이석영과 함께 활동했던 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김도태의 인터뷰를 담고 있음
이 사람은 이석영이 처분하고 만주로 가져온 자금을 4만원이라 말하고 있음

김도태는 아예 신흥무관 학교에서 이석영과 함께 생활한 사람임
임호연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1940년대이고
어느 쪽 증언이 더 신뢰도가 높을까?

40만원이 600억으로 환산되는 계산법 역시 틀렸음
이 계산법은 이덕일 교수가 쌀값을 기준으로 계산했다고 하는데
쌀값은 시대에 따라 변동폭이 엄청나게 커서 당시 물가를 환산하는데는 전혀 맞지 않음
이런 과거의 물가를 계산할 땐 보통 당시 근로자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
1910년 한양의 목수 연봉이 200원이었음을 감안하고
이를 현대의 서울 직장인 평균 연봉과 단순 비교해서 계산하면
4만원은 약 100억에서 120억원에 이르는 돈임
600억이나 2조원에 비하면 분명 적지만 한 명문 가문이 자산을
처분해 급히 마련하기엔 충분히 현실성 있는 금액이고
이 액수 만하더라도 이석영 가문의 희생이 엄청났다는 걸 알 수 있음

2.양주땅 일대 260만평이 모두 이회영 가문의 소유였다?
위의 260만평이라는 거대한 부동산 재산을 추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우당 기념관의 이 학술 보고서는 유감스럽게도 비약과 억측으로 점철되어 있음
이 보고서에서 이회영 일가의 토지 대부분을 구매했다고 추정하는
세 사람 이종석,이정완,조정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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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의 수하로 함께 망명했던 이종석이 이 지역의 대지주로 등장한다
보고서는 1910년 전후 이회영 일가의 토지 방매를 통해
이종석이 대지주가 되지 않았나 추정한다.
이유원 별장이 있었다는 양주군 화독면 가곡리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이정완이라는 대지주가 나온다. 주민들이 이유원 별장지 지주라고 기억하는 이정완과 동일인물이다.
이정완이 소유한 전답,임야 일체가 이 지역 최대 지주인 이유원의 소유지였음이 틀림없다.
이회영과 인척지간인 조정구의 땅 역시 발견됐다
조정구는 한일병합 이후 양주 진건면에 들어와 살았다.
풍양조씨 문중땅이 부근에 산재해 있는데 조정구의 소유지는 이 문장땅과 다르다.
이 조정구의 땅이 이회영 가문이 판 토지라고 판단했다.
대한제국 양안과 총독부 토지조사부를 통해 파악한 이회영 일가 토지는
충주 일대 9만여평 개성,장단,경성 지역 8만여평,양주일대 251만평이며
이중 처분하지 않은 개성,장단일대의 토지 8만여평을 제외하고 260만평을 처분해
현금 40만원을 조달해 망명했다. 현시가로 400억여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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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들에 대해 한명 한명 뜯어보자

2-1)이종석
보고서에선 이 이종석을 이회영의 수하로 함께 망명해 무관학교을 나온 이종석이라고 주장하고 있음

그런데 이 사람 주소가 보고서 표에는 경성부 중부 장교동이라 나오는데 실제로는 한성 남서 남수동으로 나옴

그래서 보고서는 '혹은' 이라고 꼬리를 달아놨지만 애초에 장교동에 사는 이종석은

동명이인인 교육사업가 이종석임
이 사람은 엄청난 거부로 일제 시대 내내 교육 사업에 투신했던 사람이고

그 공로로 1996년엔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았음
서울 송파에 있는 사립 보인고등학교가 이 사람이 세운 보인실업학교의 후신임
이회영과는 연결점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양주에 큰 땅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 보고서에 동명이인으로 불려와 그의 땅이 원래 이회영 소유였을거라고 추정되고 있음
이회영의 이름을 위해 또 다른 훌륭한 일을 했던 타인의 이름을 도용한거임

2-2)이유원&이정완
"이회영 일가의 자금을 댄 이석영은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먼 친척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유원이 죽고 그의 양주 땅 대부분을 물려받아 그걸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는
익히 알려진 내용임
이 보고서에선 지역 주민의 증언을 토대로 이유원 소유였던
양주 일대의 토지를 이정완에게 넘겼고
이것이 이석영이 상속받은 소유지였을거라 추정하고 있음
그러나 이 역시 토지 규모와 논리부터 시작해 타임라인까지 맞지 않음
우선 이유원이 그가 갖고 있던 별장지를 이정완에게 판 건 맞음
1만 7천평되는 규모였고 이는 1913년 총독부 토지조사부에 나옴

그런데 이정완은 그거 아니더라도 양주 일대에 190만평에 이르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고서는 그게 전부 이유원의 땅이 틀림없다라고 갑자기 비약을 시전하고 있음

보고서가 근거로 드는 황현의 매천야록에선
이유원은 양주에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 라고 쓰고 있지만
야사의 기록이고 이 문장을 통해 황현은 이유원을 부패했다고 까기 위해 과장해서 쓴 글에 가까움
이정완의 190만평 땅이 이유원 땅이었다는 근거가 되기엔 부족함
그리고 그걸 차치하더라도 이상한 게 있음
뭔지 알겠음?

증언록에선 주민들의 입에서 단 한번도 이석영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음
주민은 별장지 토지가 거래된 건 이유원과 이정완 사이에서의 일로 증언하고 있는데
이유원이 죽은 건 1888년임 이회영 일가가 망명한 건 1910년 겨울이고
그러니까 이석영이 이유원에게 상속받기 전의 거래라는거임
결국 이 1만평짜리 땅 역시 '이석영이 자금 마련을 위해 양주 땅을 처분했다' 라고 하기엔 무리임

2-3)조정구
풍양 조씨는 애초에 조선 전기부터 권문세가였음
그리고 양주 자체가 풍양조씨 세거지로 풍양조씨의 문중땅이 산재해있는 곳임
그러니 조정구의 토지 역시 그냥 애초부터 조정구 가문의 땅이었을 확률이 높은데
보고서는 조정구를 이회영 일가와 인척관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정구의 토지가 이회영 가문에게 구매한 토지가 상당수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쓰고 있음
결국 이런식으로 추정과 킹능성으로 퉁쳐놓은 보고서인데도

현재는 이게 마치 제대로 확정된 내용인양 돌아다니고 있음

3.이회영에 가려진 이석영
맨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이석영 가문은 분명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4만원(120억원)이라는 자금을 만들어 신흥 무관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매진했음
그런데 문제는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이석영과 이시영이 되어야하는데
모종의 이유로 우리는 그들이 아니라 넷째 이회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임

이회영이라는 개인의 행적 대부분은 이회영의 동지인 이관직이 썼다는 회고록 '이회영 선생 실기'에 기반하고 있음
이 책은 이회영이 신민회 창설을 주도했고 헤이그 밀사를 기획했고 6형제 망명을 주도했다고 쓰고 있음
신흥무관학교 역시 이회영 주도로 설립했다고 쓰고 있음
심지어는 고종의 망명 역시 계획했으나 고종의 사망으로 실패했다고 써있음

이 실기는 이관직이라는 이회영의 동지가 직접 쓴 회고록이라 알려져
많은 학술자료에도 인용되고 있음
그런데 이 문서는 사실 집필시기나 필자 모두 불명임

이 회고록의 특징은 인물들에 대해 상하위계질서를
칭호를 통해 매우 분명하게해서 구분했다는건데
예를 들어 자기보다 윗사람이나 선배면 공(公)이나 선생을 꼭 붙이고
아랫사람이면 군(君) 또는 소년이라고 붙여놨음

그런데 막상 이관직 본인을 칭할 때는 나,저,본인 그것도 아니면
그냥 건조하게 이관직이라고 써야 맞는데 이관직이라는 이름에까지 선생이라는 칭호가 붙음
이 세상에 자기 회고록을 쓰면서 자신을 선생이라고 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거임
이는 곧 이관직 본인이 쓴 회고록 아니라 정체 불명의 누군가가 쓴 평전이라는 뜻임
아무튼 위에서 언급한 이회영의 행적들은 다른 사료에는 일체 등장하지 않고
(즉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오직 이 이회영 실기에만 나오는데
이회영과 함께 생활한 이관직이 직접 쓴 회고록이 아니라면
결국 사료로서 인용될 가치가 없는 문헌임

그런데 이 책의 1985년 번역본에선
이런 문제가 될 수 있는 호칭들을 전부 삭제해놨고

실기 원본에 있던 '근래 지사들이 자칭 설립자라 분분히 서로 전하여 신흥군관학교의 주인공이 되신 우당 선생의 방명(아름다운 이름)은 세상에 매몰됐으니 어찌 가석하지 아니하리요' 같은 당시 무관학교 설립자에 대한 논란을 써놓은 부분은 아예 번역본에서 삭제되어 있음
결국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어떤 목적이 존재한다고 밖에 볼 수 없음

이회영은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을 했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음
그러나 그의 행적은 어떤 이유로 매우 과장되어 있음

이회영 사망 당시 32년 11월 21일 중앙일보 기사임
기사에선 "그는 만주로 이주한 뒤 가족 전부를 그대로 두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6년동안 서울에 잠적하여 있었다" 정도로만 쓰고 있음

그에 반해 2년 뒤 이석영이 사망했을 때 34년 3월 1일 매일신보에서는
"영석 리석영씨는 지난 16일 오후 2시에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서거했다
(중략)
경술년에 전가족과 같이 만주 유하현 추가가로 이거한 이래 신흥강습소를 설정하고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다"
라고 쓰고 있음
당대에는 신흥 무관 학교를 세운 게 이석영이라고 알려져있었고
이회영은 독립 운동가 형제들 중 한 명 정도의 위치로 알려져 있었다는거임

그런데 현재 이석영이라는 이름은 이회영에 밀려나고
심지어 이석영은 이회영의 주도로 전주 역할을 한 수동적인 존재로까지 묘사되고 있음
결국 우리는 이들을 이회영 가문으로만 기억하고 있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회영이든 이석영이든 그 누구도 폄훼하려는 게 아님
그들은 어두운 시기에 숭고한 희생을 한 위대한 영웅들임
그러나 사료와 숫자를 조작하거나 짜깁기해서까지 신화를 만들어낸다면,
그리고 그것이 심지어 어떤 목적을 갖고 행해진다면 결국 독립 운동의 순수성까지 의심받는 날이 올지 모름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전재산을 내던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 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진짜 주인공 이석영의 이름이 바래고 있다는거임
이제는 형제들이 모두 위대하다고 해서 그들을 이회영 가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퉁그려 기억할 게 아니라
형제들 한명 한명이 모두 각자의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함
🔥 실시간 네티즌 베스트 반응
- 1XXXXXX6흥미본위가 아니라면 이런 글은 출처 표기를 하는게 좋을듯난 비전공자들이 출처 표기 안하고 쓴 글은 아예 안 믿어서
- 해XXXXXX팔이회영 손자가 정치인인 것과 유관한건가? 하는 약간의 의심이 들긴 하네
- SXXXXXXe일가가 처분한 재산 규모가 과대평가되었고 실제 리더는 이석영이었다는건가
- TXXXXXX9재산 규모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견해는 이미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제기되긴 했는데 이회영 개인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이룩한 공도 전부 이회영에게 돌아간 부분은 나도 처음 보네.
- 尹X賀팩트체크 ㅊㅊ
- 헤X노맞긴 해 커뮤글이어도 진지하게 가려면 룰을 따르며 해야 신빙성이 생기지
- HXXXXXXy기존 사관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려면 확실한 자료와 출처를 밝혀야지.
- 장X준본문에 참조한 자료들 사진 첨부해가며 꽤 세세하게 밝혀놓은거 아님?
- 알XXXXXX트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을수도...?
- 첫XXXX욱이시영 선생도 부통령까지 지냈는데 그럴 가능성이 좀 있나 싶음
- 딕X임요전에도 댓글 달았지만따라줬을 가족 모두 단체로 10만원권에 모델로 넣으면 반발도 덜하면서 사람들 관심도 늘 것 같은데
- 올X뭔 좆같은 소리여 이게
- eXXv중간에 이유원과 이정완 사이 거래시점이 1888년 이전이라는 증거가 없는 이상 증언상 이석영이 없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게...상속받고 (거의 바로) 팔았다면 그 지역 사람들은 기억 못할 수도 있음 수십년동안 이유원 대감님 별장이었는데 양자가 상속받고 얼마 안되어서 팔았다면 양자를 누가 기억하겠음 증언에 없다고 안팔았다는 건 좀 비약인듯그리고 190만평 땅 중 대부분이 임야인데 그건 산지라는 뜻이라 가치가 확떨어짐 면적대비 별 의미없는 부분일 가능성이 높음왕현종 교수님이 광무양안 연구 깊게 한 분인데 저 지역 양안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재산 다 처분한 이후 자료인 토지대장만 가지고 거꾸로 추산하다보니 뭔가 핀트가 안맞는 부분이 생기긴한듯
- 알X다가져온건 4만원인데 급처해서 가져온 돈이라 원래였으면 40만원은 했을 재산이라는걸로 봤는데 뭐 그런식의 내용일걸?
- 첼X잉대한민국 goat 집안인듯
- 호XXXX즈경부신 이회영
- 치XX약양세형의 영흥 지독호의 쌍사자대동
- 아XXX스고종도 아니고 2조는 좀
- 기XXXXX약나도 독립운동사 전공이라 공부하면서 금액은 조금 과장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많이 뻥튀기됐었네
- uXXXXXXs"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ㅡ 이회영 ㅡ
- 시XXXX털내 조상인디 이 분 (냉장고 1대임)
- 이X용좋은 글 감사합니다
- SXD일단 왜 처분 자산에 대한 평가액이 600억 vs 2조인지가 궁금. 2조가 납득이 되...나?
- 마XXXXXX라2조는 2010년대 정확히 기억안나는데 암튼 저때 공시지가 환산한거 ㅋㅋ
- 장X준본문 중간에 나오는데 저 수백만평 땅의 현재 공시지가를 셈하면 수조원에 이른다뭐 이런 계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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