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와 오마 샤리프 :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거룩한 용기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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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방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다.

당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안와르 사다트」, 「지미 카터」, 「메나헴 베긴」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
이집트 대통령

알제리 대통령 부메디엔(Houari Boumediène)은
카이로에 전화를 걸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Anwar Sadat)가 수화기를 들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나일 강변)
(이집트가 2차, 3차,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과
매번 피튀기게 싸울 때마다 알제리는 이집트를 도왔다.)

(특히, 1956년 2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공화국은
당시 프랑스와 싸우는 알제리 독립군을
전폭적으로 도왔고
프랑스로부터 보복 폭격까지 당했다.
이와 같이 이집트와 알제리는 혈맹이었다.)

(안와르 사다트, 부메디엔, 카다피
-모두가 이웃한 국가의 통치자들)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1918년생)는
알제리의 부메디엔(1932년생)보다 13살 많다.
"누르(안와르 사다트를 부르는 애칭이며 '빛'이란 뜻),
왜 '솔로몬 왕'이 되고 싶어진 겁니까?"
"누르, 지금은 아닙니다.
도대체...도대체 왜 지금 그런 결정을..."
둘은 서로를
누르(Noor, 안와르의 애칭), 아부(Abu, ㅁㅁ네 아빠) 라고
서로를 막 대할 정도로 친밀한 호칭으로 불렀다.

사다트 : "이제와서 돌이킬 순 없어...
이삭의 자손들과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이제 싸우지 않아."
(1979년 공식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이 체결된다.)
"뭐라구요?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아랍에서
고립시키려는 겁니다.
우리 아랍국들을 끝내 저버릴건가요?"
(이집트는 아랍 진영의 가장 강력한 군사력 보유국이다.)

알제와 카이로 간 국제 전화는 긴 시간 계속됐고
이때 쯤엔 서로 울먹거리는 지경이었다.
"누르, 난 당신이 없으면 안됩니다."
사다트 : "그건 나도 그래, 난 자네가 없으면 안돼."
사다트 : "형제여, 난 결단한 거라네,
결단하는 자가 끝까지 모든 걸 책임진다."
"누르, 안돼, 제발 그러지말아요!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르라면 그럴건가요???"

사다트 : "그래, 기꺼이 그러지..."
"......당신을......내 형제라 부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부메디엔은 이렇게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부메디엔은 망연자실 카이로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고
그의 영부인 '아니사(Anissa)'는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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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 외교 관계였던 양국 통치자는
1977년 7월 27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정상 회담이 마지막이었고
이듬해 부메디엔은 사망하게 된다.
부메디엔의 사망 뉴스를 본 사다트는 한참 동안을
자신의 집무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란의 마지막 국왕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쫓겨난 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떠돌다 이집트에 도착했다.
레자 팔레비는 1980년 향년 60세로 카이로에서 죽었다.

(팔레비 국왕, 사다트 대통령)
미국에서도 그닥 반겨주지 않은 팔레비가
마지막으로 카이로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한 결정은
부메디엔의 비극적인 죽음을 아파했던 사다트의 인간적인
회한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운구되는 팔레비의 관을 향해
경례하는 사다트 대통령)

(참고로 이집트인들은 이웃한 나라들 복이 지지리도 없다고
스스로 자조하는 밈이 있다.)
1978년 9월 17일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했고,
이집트, 이스라엘 두 정상은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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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남예멘 등 5개국이
이집트와 단교했고
(사실, 이집트가 먼저 외교 공관을 철수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1980년)이 곧이어
이집트와 단교를 단행했다.
공식적으로 1989년 아랍 연맹 본부가
다시 카이로에 돌아오며 모든 관계가
원래대로 회복된다.

카이로, 아랍 연맹(Arab League) 본부

'사다트'는 전임자 '나세르'의 경직된 정책이
나라를 파산시키고 아랍 세계 내부에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강요했으며,
그 대가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이집트 방문 당시)

(1979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이집트 방문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부부와 '사다트' 부부)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1970년에 사망), 부통령 사다트
이후 사다트가 이집트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
◆
사다트는 20세기 이집트의 험난한 역사를
자기가 마무리 짓고자 했다.

사다트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개방 정책(infitah, 인피타)이라고도
불리는 친서방 개방 정책이었다.
이집트 경제는 상승세를 보였다.
미국 원조 자금 증가, 수에즈 운하 수입, 그리고
신흥 관광 산업이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

(수에즈 운하는 1967년 중동 전쟁 패배로 폐쇄되었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1975년에 운하를 재개통했다.
그 기간 동안에 전 세계 해운 회사들은
다시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긴 대체 항로를 선택해야 했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 (The Spy Who Loved Me)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배경으로 화려한 오프닝으로 시작)


이집트 관광 산업은 때아닌 대호황을 맞이했다.
겨우 서방권 영화 하나의 흥행 위력이 이렇다면
사다트의 이집트가 가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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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이집트 출신 세계적 배우
오마 샤리프(Omar Sharif)

오마 샤리프(Omar Sharif, 1932~2015)
유색 인종으로서 당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미권 영화계 정상에 올랐던 배우
1960년대 이집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정권은
오마 샤리프가 유대인 여배우와 러브씬도 종종 찍으며
유대계 자본 영화들에 자주 출연한 것을 이유로
이집트 입국을 사실상 금지했다.

(오마 샤리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
그녀는 유대인 정체성이 강한 미국 배우였다.)

오마 샤리프 또한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 생태계 속에서의
자신의 입장을 변명할 생각도 안했고
자신의 고국 이집트에 미련이 더는 없었다.
(훗날 샤리프의 아들은 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칭기즈칸(Ghenghis Khan)부터 '체 게바라'까지도 망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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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미국 수도 워싱턴 D.C.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백악관 국빈 만찬에 동반 참석했다.

(국빈 만찬장 파티에서 마이크를 잡은 '오마 샤리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파티 분위기를 더 띄우기 위해
재주껏 '오마 샤리프'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오마 샤리프, 사다트, 포드)
"신사숙녀 여러분,
여기 '할리우드의 술탄(Hollywoo's Sultan)'이 계시는군요,
술탄과 사다트 각하의 만수무강을 위해 건배!!"


(Omar Sharif & Anouk Emiee)
오마 샤리프와 프랑스 여배우 아누크 에메


오마 샤리프는 그와 호흡을 맞췄던
수많은 아름다운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기 때문에
실제로 '유혹의 술탄'으로 통했다.

(오마 샤리프, 소피아 로렌)



새로 사귄 애인인 이탈리아 여배우 '바바라 부셰'
오마 샤리프가 연인 '카트린 드뇌브'와 헤어진 직후이다(!)


※ 바바라 부셰(Barbara Bouchet)의 프로필 사진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는
샤리프의 도박 문제로 갈등하다 결별했다.
오마 샤리프는 도박 중독 때문에
데이트 약속도 종종 까먹었지만
'바바라'는 진심으로 샤리프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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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대통령을 공식 초청한 만찬장에서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띄워줬으니
오마 샤리프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사다트는 오마 샤리프와 건배했다.
(오마 샤리프의 이집트 입국 금지는 3년 전에 이미 풀렸다.)
"오마 샤리프 씨, 이집트 정부를 대표해
귀하에게 용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마 샤리프가 대답했다.
"카이로에는 추억이 담긴 최소한의 물건들만 있는
작은 아파트가 한 채 있죠."
"상을 받으면 트로피를 감사히 받고 호텔에 맡기고 갔답니다.
이제 제 집에 잔뜩 진열 할 수 있겠군요."
까칠한 성격인 오마 샤리프는
말솜씨가 좋고, 능수능란한 사다트가 꽤 괜찮게 보였다.

언젠가는 사다트가 오마 샤리프에게 말했다.
"오마 샤리프 씨,
당신과 동시대를 산다는 것에 깊은 연대감을 느낍니다.
이집트를 위해서 봉사해 주실 수 있나요?
하지만 급여도 없고, 훈장도 없을 겁니다."
오마 샤리프는 1977년 가을 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프랑스 파리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방문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아직 외교 관계가 없었다.)

모르데하이 가지트(Mordechai Gazit)
-1977년 프랑스 파리 주재 이스라엘 대사
모르데하이 가지트(Mordechai Gazit)는
시오니스트인 반면에 오마 샤리프의 팬이기도 했고,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에 TV 채널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
모두가 안테나 주파수를 시나이 산 쪽으로 맞추고
이집트 TV가 틀어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저에게는 좋은 추억입니다."

"당신이 젊을때 출연한 이집트 영화들을
저도 거의 전부 봤답니다."

오마 샤리프의 초창기 프로필 사진
샤리프는 모르데하이 가지트(Mordechai Gazit) 대사를 만나
당시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직접 전화 통화를 했고
3자간의 대화는 매우 화기애애했으며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에 관해 확답을 얻는 데 기여했다.

사다트의 역사적인 예루살렘 방문을
지지하는 한 사람으로서 오마 샤리프는
사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할 수 없다면,
세상 사람들이 당신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1981년, 오마 샤리프는 카이로에서
이집트 외무장관 부트로스 갈리(Boutros Boutros-Ghali)와
잠깐의 만남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Boutros Boutros-Ghali)
1992년~1996년 제6대 유엔(UN) 사무총장 역임한 인물
집권 11년째인 당시 사다트 정권은
반대파를 강압적으로 탄압하는 성향을 보였고
경제적 불평등 심화, 국내 이슬람 종교 갈등으로 인해
극심한 내부 반발에 직면해 있었다.

오마 샤리프는 영화배우일 뿐인 자신이
정치적 발언을 할 위치가 아니란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이집트 외무장관에게 선을 지키려고 했다.
'부트로스 갈리' 장관이 말했다.
"미국 영화 《인천》(1981)에 출연하신거 잘 봤어요.
재클린 비셋(Jacqueline Bisset)하고는 어디까지 가셨어요?
들려주세요, 비밀로 할께요."

초호화 출연진의 헐리웃 영화 《인천》에 출연했던
재클린 비셋(Jacqueline Bisset)
'인천(Inchon)'은 헐리우드 역사상에 망작으로 남는다.

말년에 재회한 오마 샤리프와 재클린 비셋(Jacqueline Bisset)
..............
오마 샤리프가 말했다.
"사다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부트로스 갈리는 자신이 말실수를 저질렀으며
도로 주워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마 샤리프가 말했다.
"사다트는 지금 고독한 사람입니다.
그를 곁에서 잘 지켜 주세요.
이집트는 앞으로도 그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부트로스 갈리'는 열렬한 사다트 추종자였고
오마 샤리프가 괜한 염려를 하고 있다며 대답했다.

부트로스 갈리 외무장관(사다트 대통령 오른쪽)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에서,
사다트 바로 뒤의 안경 쓴 사람이 부트로스 갈리 장관)

('지미 카터' 뒤편에서 그를 바라보는
부트로스 갈리 이집트 외무장관)
나중에 알려지기로는
영국대사 마이클 위어 경(Sir Michael Weir)이
동석하고 있었고
사다트 대통령이 수개월 내에 사임할 의사를
매우 진지하게 갖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고 한다.

마이클 위어 경
(Sir Michael Weir, British ambassador in Cairo)
1979년부터 1985년까지
그는 카이로 주재 영국 대사로 재직했다.
1981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암살당했을 당시,
그는 사열대의 사다트 대통령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탄환이 몸을 스쳤고 이집트 경호원들의 구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그는 사다트가 고통 없이 즉사했다고 증언했다.

(마이클 위어 경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 V1 로켓이
집 옆에 떨어져 다친 특이한 경험이 있다.
마이클 위어 경은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를 다룬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 대표단으로서
베트남의 총선거 실시를 비관적으로 바라봤고
프랑스, 미국에 동조하여 남베트남 수립에 찬성했었다.)

(자신의 초상화 밑에 자리한 사다트 대통령)
1981년 10월 6일,
로얄 몽소(Royal Monceau) 호텔
오마 샤리프는 로케이션 촬영 스케쥴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그 날, 사다트의 사망 뉴스를 보고 지인들과 만나
머리를 양손으로 싸매고 있었던 오마 샤리프는
자신의 명대사 한 구절을 인용했다.
"잘 가, 나의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그대,
잘 가, 나의 자랑, 잘 가"
-1965년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오마 샤리프의 대사 中-
◆
친서방 노선으로 선회한
사다트 정권은 대한민국과의 공식 수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1962년 카이로에 대한민국 대표부가 영사급으로 왔지만
이집트는 아랍-아프리카권 대표적인 친북 성향이었다.)

(사다트 대통령의 가족 사진)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에 대항해 독일 편에 가담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던 사다트는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Cairo Conference)에서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이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선언을 들으며
한국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품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을
서울과 8시간 시차가 나는 이집트 카이로에서도 알았을 때
사다트는 애도의 뜻을 담은 조전을 '공로명'에게 보냈었다.

공로명(孔魯明, 1932~2026), 당시 카이로 주재 총영사

이미 그는 작년인 1980년에
카이로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국제 외교관 포럼에서
제8대 주 카이로 총영사 공로명(孔魯明)을 만난 적이 있었고,
공로명 총영사에 대한 인상은 좋았고
자기와 같은 군 장교 출신에 영어 구사에 뛰어난 그가
한국 외무차관보가 되어 서울로 영전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1980년 당시 대한민국 서울)

해외 학계에서는
측근이나 부하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박정희는 1979년, 사다트는 1981년)
그들이 가진 최후의 유사성면에서
극적인 공통점이 자주 비교되곤 한다.

1981년 내내, 이집트는 민심 이반이 점점 커지며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 박정희가
자기 측근에게 죽었다는 소식은
'사다트'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인지
자신의 다중 경호망을 담당하던
베테랑 실무자들을 대거 교체하기에 이르렀고
그간의 철저한 경호망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
사다트는 어떻게 죽었는가?
사다트 암살 사건

1981년 10월 6일은
1973년 4차 중동 전쟁, 즉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집트 군(Egyptian Armed Forces) 수에즈 운하 도하를
기념하는 승전기념일이었다.


(1973년, 물대포로 모래 방벽을 무너뜨린 뒤
수에즈를 점령하는 이집트군)


(그 장면을 재현한 군사박물관의 디오라마)

(이집트 부통령 무바라크, 사다트 대통령)
오후 1시 공군 전투기가 상공을 날고 있을 때,
행진 대열에 있던 군용 트럭 한 대가 멈추었다.
멈춘 트럭에서 AK-47 자동소총을 든 한 장교가
다급하게 뛰어내렸다.

※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Khalid al-Islambuli) 중위
-1년 뒤 총살형으로 처형됨-
국제 테러단체 이슬람불리 여단(Islambouli Brigade)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

사다트의 좌우에 있던 부통령 '무바라크'와
국방장관 '아부 가잘라'가 수상함을 느끼고서
사다트를 가볍게 제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트는 이를 무시한 채,
그 장교가 경례를 하려는 줄로 생각하고
답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 순간에 이슬람불리 중위는 사열대를 향해
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다른 3명이
트럭에서 뛰어내렸고,
그와 같이 사열대를 향해 뛰어오면서 무차별 발포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열대에 도착한 그들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했다.
사열대에 있던 사람들은 의자를 마구 집어던지며
그들에게 저항했다.

대통령 사다트를 포함해
콥트 정교회 주교, 쿠바 대사 등 퍼레이드 관람석에 있던
11명의 고위 인사가 총격과 수류탄 폭발로
함께 목숨을 잃었다.
아일랜드 국방장관, 북한 대사 등 38명이 부상을 당했다.

퍼레이드를 생중계하던 이집트 국영 텔레비전은
재빨리 쿠란 낭송으로 화면을 전환했다.
(우리의 애국가 송출처럼
이집트는 쿠란 낭송이 방송 대기 화면이다.)


※ 모셰 사손(Moshe Sasson)
이집트 주재 이스라엘 대사
카이로 주재 이스라엘 대사 '모셰 사손(Moshe Sasson)'은
"쿠데타가 났군, 난 여기서 죽는구나!"
라고 직감했으나,
한 이집트 경호원이 그를 덮어 보호했고
즉시 대기하던 차량으로 업혀져 나갔다.
이집트 경호원은 차량에 부착된 이스라엘 국기를
신속하게 부러뜨렸고, 그를 태워 출발시켰다.
"가라! 전속력으로 밟아!"
시간은 불과 20초 정도였다.
모셰 사손(Moshe Sasson)은 뒤를 돌아봤더니
권총을 들고 뛰어가던 그 경호원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오른쪽이 '모셰 사손' 이스라엘 대사)
모셰 사손(Moshe Sasson, 1925–2006)은
소싯적엔 과격파 시오니스트였다.
(무슬림을 몰살하기 위해 독극물 제조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사람이 어찌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안와르 사다트'의 이상과 평화 실현에 대해 변호하며
이집트 친선을 위해 활동했고
그렇게 여생을 보냈다.
'모셰 사손'은 '사다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검소하게 살았고 독실한 신앙인이기도 했죠.
사다트의 이마 한가운데 있는 검은 점은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했던 오랜 세월 동안 생긴
'굳은살'이었습니다."

◆
수도 카이로의 사다트 추모관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묘소와 기념관은
수도 카이로의 나스르 시티(Nasr City)에 있는
무명용사 기념비(Unknown Soldier Memorial)
경내에 위치해 있다.


1981년 10월 6일 승리 기념 퍼레이드 중 피살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시신은 사열대 건너편에 있던
무명용사 묘지 경내에 안장되었다.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사열대에는
운명의 날, 암살범들과
그들에 대항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성과 기록성을 위해
고대 이집트식 부조로 재현해 새겨놓았으며
이장면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과거에 언론지 Al Gomhuria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던
사다트는 여러 권의 회고록과 자서전을
직접 집필하며 글쓰기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안와르 사다트는 자신의 칼럼에 이렇게 썼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죽음은 통과 의례와도 같다.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이 더욱 가치를 가진다면
그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거룩한 용기가 생긴다."

◆ 참고 자료 ◆
Man Of Defiance : Polical Biography Of Anwar Sadat
도전의 사나이: 안와르 사다트
Israeli, Raphael
라파엘 이스라엘리
1985년 영국 Weidenfeld and Nicolson 출판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실시간 네티즌 베스트 반응
- 악X르"나는 시나이산에서 3개의 종교를 대표하는 우리가 회담을 하는 것을 꿈꿉니다. 이것은 제가 매일 신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 안와르 사다트가 캠프 데이비드 협상 중 미국 대통령 카터, 이스라엘 총리 베긴을 상대로 한 연설
- 악X르미국의 지미 카터도 100명이 넘는 외국 정상들을 만났지만, 가장 좋아했던 인물로 사다트를 꼽고, 본문의 부멘디엔도 그렇고... 루마니아의 악명 높은 차우셰스쿠(자국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국정상들에게 무례한 행동으로...)도 사다트와만은 절친하게 지내면서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권유했던 것을 보면...사다트에 대한 정치적인 호오를 떠나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간적인 매력은 정말 대단했던 사람 같습니다.* 사실 독재자 밑에 2인자는 언제나 위험한 법인데, 나세르 밑에서 2인자였고 그의 사후 정권을 차지한 사다트 관련 사다트는 스스로를 '개그 캐릭터'화 했고 그 떄문에 나세르는 이 친구를 경계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물론 사다트 자체가 원래 유쾌한 성격이기도 했고...
- 악X르참고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는 사다트의 암살자 칼리드 알 이슬람 불리를 기리는 거리가 있는데, 무바라크 실각 이후 이집트 군부와 이란 사이에서 국교 재개 협상 때 이집트가 국교 재개 조건의로 그 거리의 이름을 바꿀 것을 제시했지만 이란이 거절하여 결국 국교 재개 협상이 실패(물론 다른 요인들도 있었지만...)하기도 하였죠...
- 악X르오마 샤리프의 평화를 위한 노력도 참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본인게도 위험한 일 이었을 수 있을 텐데...예를 들어 이집트의 노벨상 문학상 수상자 마흐푸즈는 사다트 정권에 비판적 지식인었지만,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은 더 이상 전쟁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지지하였는데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의 사주를 받은 청년의 테러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게 되죠...* 물론 그가 쓴 작품 <우리 동네 아이들>이 이슬람 신앙을 모욕했다고 주장 되어진 것도 테러의 결정적 원인이기는 한 데... 이 책 자체도 사실은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동지적으로 묘사했고 오히려 현대과학에 비판적인 내용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눈에는 어쨌든 거슬렸던...* 그외에도 마흐푸즈는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사건 떄도 루시디를 옹호하며 호메이니를 테러리스트로 비난 했는데...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 지지가 이런 부분들과 맞물려 테러의 타깃이 되었죠...
- 마XXX루무바라크는 저 사건에서 살았나보군 그후로 독재를 이어갔다니
- 시XXX프파라오에게 죽음을!
- 시XXX프대규모 중동전쟁이 저 이후 안일어난거만으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노벨상 탈만 하죠
- 빛XX명몰라도 되는 사실) 오마 샤리프가 출연했다는 인천 이라는 영화는 문선명이 만든 영화. 원래는 신약성경 기반으로 10부작 대작 영화를 만드려고 했는데 돈 문제인지 인천상륙작전 주제 1편으로 줄임. 돈지랄은 거하게 해서 배우진도 재클린 버셋, 로렌스 올리비에, 미후네 토시로 등 비싼 할리우드 배우 다 데려오고, 감독은 테렌스 영, 음악은 제리 골드슈타인에게 맡김.
- 빛XX명그런데 문선명 업무 스타일 상 영화 제작 디테일까지 관여하고(크레딧에 자기 이름 없다고 크레딧 부분 재제작 등), 한국 촬영은 좋은데 스태프간 소통 미스로 같은 장면을 여러번 촬영하고, 태풍 억까로 시설 날아가는 사건이 터져 영화도 폭망하고, 그 여파로 배급사인 mgm도 부도맞은 게 ㅋㅋㅋ
- 빛XX명문선명과 통일교가 온갖 분야를 찔러본거는 유명하고 예술파트 중 공연 분야는 리틀엔젤스, 유니버셜발레단이 성공했지만 영화는 저 영화 폭망으로 통일교 흑역사로 등극함. 그래도 문선명 맏아들이 엔터사 세워서 투자한 영화 중에 올드보이가 있어서 약간은 명예회복했다 봐야하나 ㅋㅋㅋㅋ
- BXXXX8오늘도 한편의 장엄한 다큐한편을 써주셨군요 ㄷㄷ끝까지 몰입해서 잘 앍었습니다. 저도 추천 하나를 보대드립니다.
- 필XX랑개추
- 축XXXX해존나 재밌네 ㄷㄷㄷㄷ
- 경XX월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달아 읽었네
- 토XXXX노위대한 대통령이네
- NXXXX침모셰 사손이라는 인물 아예 사람이 바뀌었네 죽을 때까지 그 경호원 생각했으려나
- 종XXX서전쟁영웅이자 강력한 권한 가진 대통령이었다지만 이스라엘 전쟁 유족과 피해자들이 당장 두 눈 부릅뜨고 있던 상황이었고 중동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식 분위기몰이도 호응받고 있었던 시점인거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였지과거를 역사속 지식으로 소비하는 현대인들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도 그런 영역인것 같음헤게모니 여론 역류하는 바람에 욕쳐먹고 있던 사다트나 라빈 등의 선택과 용기는감정이입을 거쳐야만 진정한 지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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